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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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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BY 안개 2001-09-05

그녀가 왔다.
베란다에 나가 밖을 내다보다가 얼핏 옆집 베란다가 환했다.
세상에, 식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탐스런 붉은 페츄니아가 아담한 토분 세 개에 담겨 이층 베란다 위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못 보던 것이다. 이 주 동안 어디 외국에라도 갔다 온 것일까.
초인종을 누르자 그녀는 내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지난번과 달라진 것은 없지만 어수선했던 방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벽면엔 이주 동안 보고싶어 몇번이나 301호 초인종을 누르게 하던 그림이 그 자리에 변함없이 걸려있었다.
시간이 그림에선 멈춰있다. 내가 그림을 보는 동안 그녀는 아무말 없이 책상 위를닦고 물을 끓였다.
"그 그림 맘에 드세요?" 그녀는 한참동안 그림에 넋을 빼앗기고 있는 내게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네. 난 집이 작아서 이렇게 큰 그림은 걸어 놓을 생각도 못했어요." 그녀는 커다란 가방에서 옷을 꺼내 세탁기에 넣고 책 두 권과 사진 한 뭉치를 책상위에 올려 놓았다.
"지난번 그 심리테스트 재밌었어요." 그녀가 일이라도 시작할까봐, 그러면 일어나야 할 것 같아서 말을 붙였다.
"상대 한테도 해봤어요?" 그녀가 의자에 앉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상대요? 아, 남편한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나요, 했다.
남편의 반응을 그대로 말할 수가 없다.
"재밌어 하던데요." 내 말에 그녀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재밌어 한다구요?"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크게 나오자 그녀도 놀란 모양이다.
"남자들은 그런거 싫어 하거든요." 그녀는 내 말이 틀렸다는 걸 나무라듯 말하고 등을 돌려 컴퓨터를 켰다. 그녀는 사진을 보며 빠르게 좌판을 두드린다. 그녀의 손이 얼마나 빠른지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등이 심하게 움직인다. 혼자 있고 싶은가 보다. 조용히 그녀의 집을 나왔다.
남편은 말했었다.
아내는 딱히 뭐라고 말할 여자가 아니야. 난 누구한테도 내 고민을 털어놔 본적이 없어.
아주 어렵게 말을 꺼내면 아이구 복에 겨운소리, 하고 모두들 그래.
아내는 문학 계간지와 여성지를 정기구독하고 내가 보기에도 이해하기 힘든 경제 신문도 꼬박 꼬박 훑어보지. 문학 계간지에서 맘에 드는 시를 외우고, 기업공시를 살핀 다음 주식도 사지.
여성지에서 생활 절약 아이디어나 음식 궁합 같은걸 오려 파일에 스크랩하기도 하고 가끔은 분위기를 낸다고 일류 호텔 레스토랑에서 눈여겨 봤던 테이블 세팅에다 스테이크까지 비슷하게 요리해서 촛불을 밝히기도 해.
언젠가 내 대학동창회에 가서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친구하고 아주 신중하게 요즘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얘길 하는데 기가 질리더군. 친구들은 아내가 있는데서 내가 부러워 죽겠다고 하고, 아내는 겸손한 표정을 지을줄도 알지.
아내에게는 집안에서 살림만 하는 자신이, 의류업체 AD로 있는 결혼 안한 친구와 비교해서 하등 못난게 없다는 이상한 자부심으로 그렇게 기를 쓰고 있다는걸 난 눈치챘어.
그 친구와는 집안끼리도 좀 그런 사이라더군. 언젠가 셋이서 저녁을 먹었는데 그날 아내는, 무슨 외교관 파티에라도 가는 사람처럼 부담스럽도록 성장을 했고, 친구는 일을 하다 와서인지 편안한 차림이었어.
얜 결혼도 안해놓구 벌써 그렇게 퍼지면 어떡해.
아내의 말에 친구는 그냥 사람좋은 웃음을 짓더군.
아내는 자신의 그런 모습이 멋져 보였는지 기분이 좋아 혼자 많은 얘길 했지만 친구는 그다지 관심없어 하며 시계를 자꾸 들여다 봤어.
아마 그 친구는 절대 아내에게 먼저 만나자는 말을 안할거야. 그 친구한테 내가 부끄럽더군.
아내는 한마디로 완벽해. 후훗.
혼자 있을 때 혼자 있게 해주고 누군가 필요하면 옆에 있어주지.
하지만 나중엔 숨이 막혔어. 내가 뭔가를 해줄수가 없잖아. 하다 못해 내가 널 만난다고 말했더니 아내는 남자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있다는 것 조차 이해한다더군.
참고 기다리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어딘가에 씌여져 있겠지.
그 믿음에 확신을 줄순 없어.
내가 이혼한다고 하니까 다들 미쳤다고 해.
언젠간 아이를 꼭 데려올거야.
그애까지 부족함을 모르게 키울 순 없어.
넌 달라.
넌 내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
남편은 쓸쓸하게 웃으며 마주 앉아있는 내 볼을 따뜻하게 만져 주었다.
남편에게 아이가 있다는건 물론 알았다. 사정이 된다면 그 아일 내가 키울수도 있다는 말에 남편은 잠시 감격한 듯 눈에 물기가 어렸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포기 못한다고 했다. 다달이 남편의 월급에서 그녀의 통장으로 양육비를 입금시키고 한달에 두 번 남편은 아이를 만났다.
살아가는데 그다지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나는 남편의 월급이 반으로 줄어도 괜찮았다.
오히려 그럼으로 해서 아이와 아이엄마한테 가졌던 미안한 마음이 조금 줄어들었을 뿐이다.
남편 말대로라면 아이가 있는 한 그녀는 영원히 남편과 헤어지진 않을 것이다.
다만 아직도 내 쪽엔 몸만 온 듯한 느낌이 날 가끔씩 지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