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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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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BY 안개 2001-09-03

난 항상 새로운 것에 맞닥뜨리는게 두려웠다.
아주 어렸을 때 부터였던 것 같다.
몸이 약한 엄마 대신 아버지는 자주 날 데리고 모임이나 시장엘 가곤 했다. 시장 아주머니들이 예쁘다고 머릴 쓰다듬거나 엄마의 병문안을 왔던 친척들이 위로나 동정을 보내면 난 아버지 등뒤에서 그들의 시선이 떠날 때 까지 숨어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몇 년 동안 이상하게 난 편안했다.
갑자기 낯선 여자가 그 평안을 깼다.
새엄마가 오자 낯선 사람들이 들락거렸고 아버지는 그 전에 한번도 본적이 없는 얼굴빛을 하고 행복해 하셨다. 새엄마는 딱히 아버지가 없는 데서 날 구박하거나 냉랭하게 굴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숨으면 숨을수록 더 상냥하고 친절했다. 하지만 그전과 다르게 더 이상 집이 편치가 않았다.
아버지 성화에 몇 번 선을 본적이 있다. 그 남자들은 한결같이 나에게 잘 보이려고 했고 끊임없이 내 얘길 듣고 싶어했다. 영화 한편 보기 위해 상영시간 보다 더 긴 시간 줄을 서있고, 고속도로 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외곽으로 빠지려고 하는 그들을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내가 삶을 포기한 사람 같다는 이유로 아주 미안해 하고 가엾어 하는 표정을 남기고 날 떠나갔다.
남편은 달랐다. 그는 나에게 어떤 말도 억지로 강요하지 않았고 나보다도 더 한곳에서 오래 있길 원했다. 남편은 내가 자신을 편하게 해준다는, 내가 남편을 생각하는 똑 같은 이유로 나를 만난다고 했다.
"밥 안먹어?" 남편이 언제 나왔는지 수건으로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머리에서 떨어진 물기는 형광등 불빛 아래서 는개처럼 부슬거렸다. 예전엔 저러지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남편이 말하길, 아이 엄마는 머리를 감으면 욕실에서 다 말리고 나와야 한다고, 그런데 간지럽다고 물기를 피하며 웃는 날 보니 좋다고 했다. 그가 물기를 털어냈던 자리는 스트레스 때문에 빠지기 시작한 가느다란 머리카락과 물기가 번들거려 항상 걸레로 훔쳐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그러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일어나서 주섬주섬 그릇을 챙겨넣고 돌아섰을 때 남편은 양팔을 벽 있는데 까지 올리고 잠이 들어 있었다. 남편은 잘 때 팔을 올리고 잔다. 잠잘 때 만이라도 홀가분해지고 싶다는 것이 이유다. 내가 보기엔 팔을 올리는 것이 더 힘들어 보인다. 무엇이 남편을 저렇게나 세상일에 메이게 했을까.
일부러 깨워서 전기 요금 얘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불을 끄고 남편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곁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