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으로 들어서자 뭔가 반짝거린다.
어젯밤 일을 잊고 있었다. 남편이 집어던진 리모콘이 거울에 맞아 방바닥엔 거울 파편과 리모콘에서 떨어진 건전지가 굴러다녔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녀를 데리고 도로 나가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자기 집인 양 급하게 들어와선 멍청히 서있는 내 등을 잡아 식탁앞에 앉혔다. 그리고는 들고 온 메모지와 계산기를 탁자위에 놓더니 밖으로 나갔다.
나에게 시간을 주는걸까.
식탁위엔 행주 자국이 지문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방안을 치울 엄두는 못내고 행주자국을 손으로 문질렀다.
문이 열린다. 그녀가 차에서 쓰는 충전용 청소기를 들고 들어섰다.
"가만 있어요."내가 일어서자 그녀는 언니처럼 내 어깨를 한번 싸안더니 커튼을 묶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직 바람이 쌀쌀하다. 내가 흠칫 몸을 떨자 식탁 의자 뒤에 걸쳐 둔 남편의 회색 스웨터를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리고는 이불을 탁탁 털어 방 한쪽에 놓고 화장지에 물을 축여 조심스럽게 깨진 유리조각을 훔쳤다. 오랜시간 충전되었던 듯 진공 청소기가 위잉,힘찬 소리를 내며 부스러기를 빨아들였다. 따닥따닥, 청소기 입구에서 부딪치는 파편소리가 마치 깨라고 볶는 듯 경쾌하다. 걸레로 몇번 방을 훔치자 바닥이 말끔해졌다. 그녀의 행동은 갑자기 손님을 맞이하는 주부처럼 민첩했다.
이러는게 아닌데...남편은 아이를 앞에 두고 아이가 무얼 물을 때에도 건성으로 대답하며 끊었던 담배를 벌써 몇대 째 피우고 있을 것이다.
매월 둘째,넷째 주 일요일, 남편은 아이를 만나러 간다. 이번엔 꼭 같이 가자. 미리 얼굴을 익혀 놓아야 서로 좋잖아.
남편은 아이에게 해돋이를 보여주기 위해 몇 주전부터 계획했던 밤 기차 여행에 나를 데려가려고 햇다. 몸이 좋지 않다고 했는데 남편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럴거야. 넌 그애 키울 수 있다고 했잖아.
남편은 화를 내며 대꾸도 없이 앉아있는 나를 향해 근처에 있던 리모콘을 집어던졌다.
다행히 리모콘은 나를 비켜나가 벽에 있던 거울을 깼다. 물건을 던진 건 처음이었다.
큰소리 조차 잘 내지 않던 남편이 그토록이나 화를 낸 이유가 무엇일까.
남편은, 놀라 망연히 앉아있는 나를 다독이다가 기차시간에 늦을세라 허겁지겁 집을 나섰다.
물룬 난 남편의 아이를 키울 수 있다고 말했고 그 생각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러나 쉽게 그 아이를 만날 수가 없다. 그 아이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사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그녀가 욕실에서 손을 씻고 나와 맞은편 의자에 앉는다.
그녀의 표정은 장한 일을 하고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 마냥 당당하다.
부끄러워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다. 일어나서 커피 두 잔 만들 물을 가스에 올렸다.
그녀는 어딜 보고 있을까. 지난번 404호 주인 여자처럼 방안을 휘 둘러보고 결혼사진도 안걸어놨네, 하고 물으면 어쩌지. 404호 여자는 대꾸도 없이 앉아있는 나에게 202호 신혼부부는 알고 봤더니 부모 몰래 동거하는 학생이라거나, 403호 여자는 때리는 남편 피해서 이전도 못하고 숨어 산다는둥, 아파트 사람들 얘기를 소상하게 전해 주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301호 여자는 혼자 사는데 뭘 하는지 한달에 몇번 집에 있지도 않아 복도 물 청소에 한번도 참석한 일이 없다는 불만을 들은것도 같다.
다행히 커피를 들고 돌아섰을 때 그녀는 자신이 들고 온 메모지에 뭔가를 쓰고 있었다.
"이게 저희가 낸 거구요, 이쪽 게 여기서 낸 거니까 이 돈만 저 주시면 돼요."그녀가 계산해 준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녀는 돈을 받자 아무말 없이 커피를 반쯤 마시고 일어섰다.
날 당황하게 하지 않는 그녀가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