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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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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BY 인연 2001-08-26

제4부 내별의 노래

아침이 되자 드리워진 커튼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가을빛이 따라 들어왔다.
지숙은 눈이 부셔 눈을 뜨지 못한 채 팔을 뻗어 습관처럼 옆자리를 더듬었다.
지숙의 이런 습관은 정태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시작되었고 벌써 3년이 가깝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텅 빈 옆자리를 확인할 때마다 지숙은 부질없는 자신의 행동을 질책하기도 하지만
혼자가 되었다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은 이유 때문인지 눈뜨는 아침이면 자신도 모르게
정태가 누워있던 자리를 더듬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지숙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거울 속에 여인은 환갑에 가까운 여인의 모습 같았다.
조심스럽게 거울 앞에 다가간 지숙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도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50살도 안된 여자가 환갑의 모습이라니. 씁쓸한 웃음이 지숙의 입가에 번졌다.
엉뚱하게도 그간 온통 정태의 생각 속에서 갇혀 살아온 자신이 후회가 되었고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삶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가슴속에서 용솟음을 쳤다.

지숙은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서울에서 생활한지 벌써 3번의 가을을 보냈지만 지숙은 변변한 여행 한번 하질 못했다.
기껏 해 봐야 명절 때 시댁이 있는 고향을 찾아 차례를 지내고 정태의 무덤을 둘러보는
일과 집 근처 공원에서 산책을 하는 정도였으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시댁, 친정 가족들과
연락도 없이 지냈다.
지숙은 가끔씩 걸려오는 전화벨소리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다 친구들에게 안부 전화가 와도 특별하게 할 이야기가 없어 친구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통화를 끝냈으며 하루종일 책을 읽고,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마치면 당기는 얼굴에 로숀을 가볍게 찍어 바르는 것으로 화장을
끝냈으며, 입술에 립스틱 한번 바르지 않았다.
미용실 마저 자주 다녀오지 못해 길어만 가는 머리카락은 고무줄로 질끈 동여매는 것으로
머리 손질을 끝냈다.
그리고 집에서는 사철 원피스 차림이었고 좋아하던 TV 연속극마저도 보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지숙은 자신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 일에만 열중했으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정태의 죽음은 지숙의 삶까지도 송두리째 빼앗아 가 버렸다.

지숙은 오랜만에 미용실을 찾아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머리카락에 웨이브도 주었다.
무거웠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지고 상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집에 돌아 온 지숙은 거울 앞에 다소곳이 앉아 곱게 화장을 시작하였다.
정태와 맞선을 보기 위해 화장을 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지숙은 정태와 맞선을 다시 보려는 듯이 정성을 다해 화장을 하였고 마지막으로 가을 색이
나는 립스틱을 입술에 발랐다.
이제는 여행을 떠날 준비가 다 된 것 같았다. 갈 곳을 정하진 아직 정하지는 못했지만.
정태의 기일을 3달 앞둔 가을, 지숙은 자영이에게 메모를 남기고 여행을 떠났다.

자영아, 엄마다.
엄마가 여행을 떠난단다. 혼자만의 여행이란다. 긴 시간은 걸리지 않겠지만.
너는 엄마가 집에만 있다고 늘 불평을 했었지.
이제 엄마도 집에만 있지 않을 거야. 내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싶단다.
내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이제는 엄마가 집을 비워도 무섭지 않지? 그래, 그럴거야.
너도 이제 어른이잖아. 그리고 여자로서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 스콜이 쏟아지는 빈집에 너를 홀로 두고 나왔던 기억이 새롭구나.
쏟아지는 장대비와 천둥, 번개로 세상은 어둠 속에 숨어버리고 말았었지.
세상은 천둥, 번개가 삼켜버릴 줄 알았나봐.
엄마는 그때 자영이를 천둥, 번개가 삼켜 버릴까 걱정되어 너를 혼자 두고 나선 것을
얼마나 후회하였는지 모른다.
그 이후 나는 나를 절대로 집에 혼자 두고 다니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단다.
하지만 아빠는 달랐다. 결과적으로 아빠는 너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너도 알지?

자영아.
이제는 너를 집에 홀로 두고 엄마가 며칠 동안 여행을 떠나도 될 것 같다.
홀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엄마는 이제 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싶단다.
가는 곳마다 산이 낯설고, 물이 낯설고, 길이 낯설고, 사람들이 낯설지라도 그들을
웃으며 반기고 내 품에 안고 싶단다.
이 모든 것들은 나의 존재와 가치를 확인 시켜주는 유일한 단서이기 때문이란다.

자영아, 미안하다. 엄마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나서.

지숙은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라 지도
한 장만 덜렁 손에 쥐고 나왔는데 서울역에 도착하자 바로 출발하는 기차도 없었다.
지숙은 한참 동안을 역사에서 서성이다 청량리역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예전에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기차를 타고 동해안을 여행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30분 가까이 지하를 달리던 전철은 청량리역이라는 안내 방송을 내 보냈다.
청량리역사에 도착한 지숙은 다행스럽게도 삼척으로 가는 기차를 바로 탈수가 있었다.
객실에 앉아 창문을 열자 플랫포옴에서 시큼한 녹냄새가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잠시 후, 기차가 거친 기적소리를 토해내며 서서히 청량리역을 빠져나갔다.
결혼 전에 지숙은 서울에서 근무하는 정태를 만나기 위해 가끔씩 완행열차를 타고서
상경을 하였다. 그때마다 지숙은 들녘을 달리는 기차가 실어다 주는 싱그러운 바람을
맞으며 차창에 정태의 얼굴을 그렸었다.
지숙은 차창에 그려진 정태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지루한 여행을 즐겼고 미래의
꿈을 설계하였다.

기차는 어느새 속도를 높여 북쪽으로 내 달리자 정태의 얼굴이 차창에 그려졌다.
지숙은 기차가 하나의 역을 지날 때마다 정태와의 추억을 하나씩 더듬었고 또 하나의
역을 지나면 기억했던 추억을 하나씩 지워갔다.
그리고 차창에 어른거리는 정태의 얼굴도 한 부분씩을 지워 나갔다.
방글라데시의 추억을 지울 때 머리카락을 지웠고, 캐나다의 추억을 지울 때는 이마를 지워
나갔다. 지숙의 추억 지우기는 기차가 동해안 삼척에 도착하자 끝이 났다.
밤을 새워 달려온 기차는 아침이 되자 승객들을 플랫포옴에 토해냈고 지숙은 역사를 나와
바다를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다.
동해안의 검푸른 바다는 끊임없이 하얀 물거품을 백사장에 뱉어 놓았다.
정태의 장례를 위해 아크라까지 온 시동생, 정인이 말했었다. 정태의 시신을 화장한 후에
유골은 상자에 담았고 남아있던 재들은 아크라의 바다에 뿌렸다고.
바다는 세상 어느 곳과도 다 통하니까 정태의 일부도 이곳 동해안 바다에도 닿았을 것
같았다.
지숙은 물거품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바닷물에 손을 담그고 정태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지영 아빠!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혼자만의 여행을 하고 있답니다.
그 동안 내가 너무 했지요? 세상에 모든 슬픔과 불행을 나 혼자서만 지고 있는 것처럼
나는 살아왔어요. 당신이 나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슬퍼하고 괴로워하였을까, 생각하면
나는 가슴이 미어집니다.
당신은 내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결코 바라지 않았을 것인데도 무지한 나는 당신의
마음을 애써 외면하며 살았답니다.
당신이 없는 세상에 살아 숨쉬는 내 모습을 드러내는 것조차 두려웠으며, 3년의 세월은
지옥과도 같은 일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이 바라는 대로 살아가겠으며 당신의 생각 속에서 벗어 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는 동안 차창에 그려진 당신의 얼굴을 모두 지웠답니다.
미안해요, 정태씨.
결코 후회 없는 내 인생을 위해 하루를 살아도 여느 사람들의 삶처럼 살아가겠습니다.

자영 아빠!
이제 나는 여기를 떠나 당신이 묻혀있는 고향으로 발길을 옮길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서울 근교에 묻히기를 기대하였지만 그것은 나는 당신의 깊은 고향사랑을
미쳐 이해하지 못한 생각이었습니다.
봄에 다녀 온 고향은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웠습니다.
고향 땅에 묻혀있는 당신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저는 참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상경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나는 당신의 얼굴보다 당신의 무덤이 더 보고 싶습니다.
갈색으로 물들어 가는 잔디 위에 앉아 당신과의 추억을 가슴 깊이 담아 두는 작업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삶을 위해 내일을 준비할 것입니다.

편히 쉬세요. 동해안에서 지숙이가.

지숙은 동해안 바닷가를 떠나 고향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삼척에 도착하던 것과 다르게 많은 승객들로 객실이 붐볐다.
언제나 그랬지만 입석표를 사서 기차에 오른 승객들은 빈자리에 앉아 있다가도 좌석 번호를
찾는 승객이 다가오면 두려운 듯 눈치를 살폈다.
지숙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청년도 좌석표를 든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신사가 다가오자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중년신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청년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고 손가방을 짐칸에 올려놓고
조그만 책을 꺼내 자리에 앉았다.
지숙은 기차가 출발하자 온몸에 피곤이 밀려왔다. 어젯밤 잠을 자지 못한 후유증이 이제야
몰려오는 것 같았다. 지숙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몸을 덮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기차는 대전역에 잠시 멈추었고 중년신사는 여전히 지숙의 곁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몸에 덮었던 코트를 접어 무릎 위에 놓고 지숙은 차창에 가득 찬 들녘을 바라보았다.
황금빛으로 물든 벼이삭들이 풍요로운 가을을 대변하고 있었다.

"부인! 이것 좀 드시겠어요?"

지숙은 부인이라는 소리에 놀라 순간적으로 중년신사를 향하여 고개를 돌렸다.
중년신사의 손에는 캔커피 하나가 들려있었다.

"아이고, 괜찮은데요."
"아니요, 드세요. 여기 또 있습니다."

중년신사는 친절하게도 캔커피 뚜껑까지 따 놓고 지숙에게 권했다.
지숙은 하는 수 없이 감사의 표시로 중년신사에게 목례를 하고서 캔커피를 받아 들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저는 광주에서 내리는데요."

중년신사는 지숙의 행선지가 궁금했는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세요. 저는 좀더 내려 가야해요. 고향에 가는 길이랍니다."
"좋으시겠습니다. 저는 고향이 논산인데 광주에서 10년 가까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광주가 이제는 고향처럼 느껴진답니다."

지숙은 중년신사가 광주에 십 년 동안이나 살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직장 때문에 광주에서 사시나 봐요?"
"네, 그렇게 되었어요. 부인은 무슨 일로 고향에 가시나요?"

중년신사의 갑작스런 질문에 지숙은 긴장이 되었다.
지숙은 어떻게 대답을 하여야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남편을 만나러 가는 중이에요."
"그래요. 저는 마누라를 만나고 오는 길인데."
"부인께서는 광주에 계시지 않는가 봐요?"

중년신사의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고 무슨 슬픈 사연이라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숙은 괜한 질문을 했나 싶어 후회를 하고 있는데 중년신사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마누라는 동해안 바다에 있지요."

지숙은 중년신사의 엉뚱한 대답에 잠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바다요?"
"네, 바다요. 마누라는 바다를 무척 좋아했지요. 바다 중에서도 동해안 바다를 제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마누라는 바다를 자주 갔어요. 하지만 4년 전,
마누라는 위암 말기선고를 받았습니다. 3년 전,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누라는 제게 유언을
하더군요. 바다 가본지가 너무 오래 됐다고 자신이 죽으면 땅에 묻지 말고 화장을 하여
바다에 뿌려 달라고."

지숙은 중년신사의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중년신사는 속이 타는지 다 마셔버린 커피가 아쉬운 듯 캔을 가볍게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해마다 마누라가 생각이 나거나 기일이 가까워지면 동해안을 찾는 답니다.
의리 없이 먼저 간 마누라가 저를 이렇게 고생시킨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하였습니다."

지숙은 몸둘 바를 모르고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중년신사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아내를 바다에 보낸 남자의 심정을 지숙은 충분히 이해를
할 것 같았다. 지숙은 자신도 모르게 중년신사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둘은 더 이상의 대화를 하지 않았고 기차는 쉴새없이 달려 광주역에 도착을 하였다.
기차가 정차하자 중년신사는 지숙에게 정중히 작별의 인사를 하고 가방을 들고 플랫포옴에
내렸다. 지숙은 중년신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플랫포옴에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기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지숙은 빈 옆자리에 눈이 갔고 중년신사가 읽고 있던 조그만
수필집이 눈에 띄었다.
지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의 중년신사를 찾았으나 기차가 이미 떠난 뒤라서 주인에게
돌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숙은 책표지를 바라보았다. 책의 제목은 '인연'이었으며 작가는 피천득 시인이었다.
피천득 시인은 지숙도 잘 알고 있는 작가라서 그런지 책을 보자 반가움이 생겼다.
지숙은 책표지를 넘겼다. 책 간지에 최승녕이라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있었고 그 밑에는
J대학교라고 적혀 있었다. 순간, 지숙은 생각했다.
그럼, 그 중년신사가 자신이 졸업한 J대학 교수란 말인가? 지숙의 직감으로는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지숙은 고향에 도착해서도 중년신사의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숙은 정태의 무덤을 둘러보고 상경하는 길에 광주에 내려 중년신사에게 책을 전해 줄까,
망설였지만 기차 시간이 맞지 않아 서둘러 상경하고 말았다.

기차가 서울을 향해 달리는 동안 지숙은 하얀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나 있던 중년신사를
생각했다. 이상할 정도로 중년신사는 지숙에게 낯설지가 않았고 집에 도착하면 전화라도
해봐야 될 것 같았다.
집안 청소를 마친 지숙은 책에 적힌 전화번호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몇 번의 벨이 울리자 지숙의 예상대로 중년신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숙은 가슴이 뛰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참 동안 수화기를 들고 있다 전화를 끊고 말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는데 때 마침, 귀가하던 자영이가 지숙의 표정을 보고
놀랐는지 물었다.

"엄마, 왜 그래?"
"으~응. 아무 일도 아니다."

다음 날 아침, 지숙은 3년 동안 보관해 오던 정태의 옷들을 모두 태웠다. [끝]


@독자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소설의 평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