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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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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BY 아나스타샤 2001-10-15

버스를 타고 기차역이 있는 소도시로 가는 한시간여 동안
우리는 말을 아꼈다.
차창밖의 스쳐가는 풍경들도 그저 무심하게 지나간 시간들에 일조를 더할 뿐,
상심한 영혼들의 가을여행에 도움은 되지 못했다.
머리속 조차 완벽하게 텅 비었으면 좋을 일이겠지만,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왕왕거리는 소음들은 내 머리속을 차지하여 자꾸 눈밖으로 시린 무채색만 울컥거리며 쏟아지고 이태껏 단 한번도 내 옆에 없는듯, 있는듯 지켜왔던 진하와 함께 동행한다는 것 역시 얽혀진 소음으로 복잡했다.
따라나섰고, 가고있지만....

반나절을 기차에 몸을 싣고 있는동안, 우리는 천천히 풀어냈다.
그간의 모든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행여 놓칠새라 또박 또박 엮어 입 밖으로 조심스레 쏟아내었다.
진하와 함께하는 여행이 내 지나가는 소나기중에 피할 수 없는 과정 이라면억지쓰지 않고, 순리대로 풀고 싶었다.
억지를 쓴다고 하여 해결이 될 내 꼬인 운명이 아니었음을 알기에.
부끄럽지 않았다.
태원과,
경민.
그들과 있었던 느낌 하나까지도 부끄러워 하지 않으며 진하에게 쏟아내었다.
이 여행이 진하의 발목을 잡아, 역행하는 운명을 만들지는 않으리라.

반나절을 달려 도착한 곳의 외곽에서 석양 걸리기 시작하는 하늘을 향해 바위를 타고 올랐다.
붉은 융단이 머리에 펼쳐지는 바위산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진하가 내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궁금하지 않다.
나무가지에 긁혀가면서, 돌 부스러기에 미끄러져 가면서 가뿐 숨을 몰아쉬며 진하에게 의지하며 바위산을 거의 올랐다.
"뒤 돌아봐 현지야"
앞을 향해 오르느라 뒤에 펼쳐진 바다가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거기에는.....
세상의 모든것을 덮고도 남을 푸른빛이 있었고, 그 푸른빛을 서로 받아들여 끝을 맏닿은 붉은 석양이 있었다.
"내가 언젠가 이곳을 밟다가 이것과는 조금 다른 광경이지만, 절로 탄성이 일 정도의 장관을 보았었어. 그때도 역시 옆에 현지 네가 없다는 것을 슬퍼할 때였고, 널 찾으면 꼭 이곳의 광경을 같이 보고싶어서 이쯤에서 더 오르지 않고 도로 내려갔다."
"정말 멋져 진하야, 너무 멋지다"
그것은, 진하가 있기 때문이었다.
진하아닌 나 혼자 였다면, 입은 얼어붙었을 것이다.
끌어주는 진하의 손을 잡고 가파르게 남은 길을 재촉했다.
굴로된 바위를 지나 바위 정상에 함초로니 자리한 작은 암자의 마당에 들어서자 은은히 풍기는 녹차향기가 이마에 맺힌 땀을 기분좋게 했다.
"이곳엔 올라오지 않았었어,후훗"
진하가 희미하게 웃는다.
"멀리서 보고 얼른 고개를 돌렸지. 혼자 보기 아까워서...."
그랬구나....
나, 되먹지도 않은 불행을 탓하며 남의 품속을 전전하는 동안, 넌 나를위해 아껴두는 것이 있었구나....
어느 스님이 올려놓은 것인지 모를 녹차주전자가,작은 불길에 올려져 경내 한 귀퉁이에서 운치를 더해주고 있는 석양짙은 암자에 퍼지는 그 황혼의 저녁,
눈을 감는날까지 다시는 맛보지 못할 행복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소나기였다.
빗자욱 고운 경내에 나란히 앉아, 저물어가는 우리의 해를 넘겨다 보며 다시는 이런날이 오지 않는다 하여도 세상을 원망하고 내 운명을 원망하지는 않을것이라는 다짐도 생겼다.
내게는 과분한 사람과 장소였다.
인기척에 우리 둘다 뒤돌아 보니, 뜻밖에도 여스님이 나오셨다.
주인없는 방에 있었던 양, 엉거주춤 일어나는 우리 둘을 보고, 석양빛의 따듯한 미소가 가득 여스님의 얼굴에 번졌다.
사람의 얼굴에서 저렇게 편안한 웃음이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
여윈 몸을 회색으로 감싼 스님의 가벼운 발걸음에서도 향내가 느껴졌다.
"앉아서 차한잔 하실래요?"
주전자를 걸어놓은 지짓대 밑에서 불을 끌어내며 스님은 우리를 향해 물으셨다.
진하가 먼저 털썩 스님의 맞은켠에 앉는다.
모래 고운 경내는 아무곳에 앉아도 다실이 될만큼 정겹다.
그 다소곳한 바위산에 자리한 암자에서 얻어 마시는 차한잔의 소중함에 두손으로 노오랗게 찻물 밴 찻잔을 감싸고 숨을 깊이 들이켰다.

오늘만이야...
진하에게 오늘만 내 모진 운명을 허락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