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어긋났던 인연들이 모지락 스럽게도 내 운명에 덧칠을 하고,
부른 배를 부여잡고 허허로운 벌판에 서있는 나는 스스로 훑어도 어처구니가 없다.
한치앞만 볼 줄 아는 조금의 예지만 내게 주어졌더라도...
어처구니 없는 육신이 조금의 정신을 놓아보기로 했다.
맨정신 으로는 나와 배속의 아이에게는 감당하기 쉽지 않는 벼랑끝이었다.
엄마가 경민에게 연락을 하였다.
경민은 내려오지 않았다.
전화로만 자신의 심경을 시시각각 내게 애원으로..... 설득으로... 그렇게 여러날을 보냈다.
엄마는 수화기를 들고 있는 내옆에서 갖은 원망을 퍼붇고,
늙은 어미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벌겋게 번질만큼 남아있는 기력을 내게 쏟았다.
최소한 경민이 내려오기만 했더라도....
그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훌쩍 떠날 수 있는 용기만 내게 보여주었더라도....
나는 극악한 잔인한 마음은 먹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날을 기다리며 결론이 눈으로 보여졌다. 경민은 자신의 엄마와 인연을 끊지 못하는 그 우유부단으로 나를 사랑했던 것이다.
사랑에 크기가 있다면 경민의 사랑은 어느만큼의 풍선이었을까!
널브러진 몸과 마음은,
내 발로 스스로 찾아가 병원 침대위에 눕게 하였다.
해서는 안될 짓.
생명을 부여받을 자격조차도 없는 몹쓸 인간.
시트위에서 전날 투여한 촉진제의 고통으로 허리를 틀고 있었던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과 다름없는 짐승이었다.
입밖으로 비명 한번 지르지 못했다.
비명을 지를 자격이 내게 있었던가.
배속에서 요동치고 있을 나의 분신을 살해하는 그 매순간을 비명한번 안 지르고 이를 악물고 견뎌내었다.
아가야.....
너의 한도 내가 지마.
세상의 밝은빛 한번 못본 너의 암흑의 세계에 나도 같이 갇히마.
그만 힘들어 하렴.....
그만 자궁속의 끈을 놓아버리렴.
꼬박 20여 시간의 진통을 핏발 붉어져 나오도록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내었다.
나는 그런 고통도 차마 가당찮았다.
더한 고통이 있어도 받을 짓을 하고 있었으니까.
은경이 왔다.
침대 얹저리를 부여잡고 두 눈으로 은경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것도....
진통을 가라앉힌다며 옆허리를 맛사지 하는것도....
그애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지는 것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은경의 눈에 비추인 내 뒤틀어진 고통은 그애가 보는 나의 진면모였다.
진하와 함께 하였던 낯익은 거리에서 후미진 조산원의 침대에 누워있는 지금의 내 모습까지가 더도 덜도 않은 "나"였던 것이다.
마지막 알 수 없는 힘이 주어지며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지고 몸이 편안해 졌다.
양수로 흥건했던 아래에서는 세상의 모든 바닷물이 한꺼번에 급류를 탄듯 내 온몸을 빌어 빠져 나갔다.
철퍼덕 소리와 함께....
나의 아가는 그 철퍼덕 소리로 자신을 알렸다.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아니, 세상이 죽었음을.....
은경이 비명을 지르며 간호사를 부르러 뛰쳐나가고,
잠깐의 시간동안 자그마한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갓난 새소리 인것도 같고,
마른 나뭇잎에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 같은 소리같기도 했다.
그 소리는 차마 눈을 아래로 돌려 내려다 보지 못하는 그 곳에서 간헐적으로 났다.
난....
눈을 감았다.
눈에 넣지 않을거다 아가야.......
그러면 너를 잊기가 더 힘들어.
너도 나를 보면 안돼.
나한테 소리 내지마.
너는 가질 수 없는 세상의 인연을 짐승의 몸을 빌어 스쳐가는거야.
잠깐의 그 소리는 이내 그쳤다.
엄마의 손에 들려있는 의식적으로 눈길을 주지않은 작은 꾸러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의 손에 들려서 뒷곁으로 돌아 멀어지는 발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
아이는 그 주먹만한 몸뚱이와 영혼을 내가 사는집이 보이는 어느곳에서 안식 시킬것이다.
잊자.
보내주자.
모든것을...
경민의 집에는 엄마가 통첩을 했다.
그날 그 난리를 치고 난 연후에 아이에게 유산기가 있어서 그대로 쏟아냈다고....
물론 그들은 믿지 않았고,
경민이 내려왔다.
그렇게 기다렸건만, 시기를 맞추지 못하고 늦은 걸음을 어찌 떼었을까.....
훌쩍 들어간 내 배를 보며 서있는 경민을 건네보는 내 눈은 아무런 감정도 억지로 띄워지지가 않는 체념의 눈이 향해졌다.
너도 놓아줄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