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453

[제17회]


BY 아나스타샤 2001-09-18


집을 떠날때는 콧김조차 얼어붙을 추위였건만,
풍덩한 임신복을 입고 나타난 나를 반겨주는것은 청명하다 못해 눈빛이 푸른색으로 변해버릴 한창의 여름이 되었다.
친구들은 결혼 상대자를 제각기 저울질 하느라 장난이 그칠새가 없었고,
햇살 고운 바닷가 모래에 밀려드는 파도에 바지걷어 깡총거리며 하루를 친구들과 함께 보냈다.
마음껏 웃어 본 날이 기억에 아예 없는듯 웃는다는 것이 가물가물한 낯선 행위였다.
내 배를 쓸어내리며 친구들은 신기해 했고, 나는 조용히 웃어주었다.
경민에게 전화가 왔다.
형도 외갓댁에 내려갔다고.
삼사일정도 머무르다 서울에 다시 올라갈 계획이었기에 별다른 생각없이 올라가겠노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를 불안감이 수화기를 놓은 손을 떨리게 했지만,
모든것 잊고 엄마만 생각하는 며칠을 보내자고 훌훌 털었다.
엄마는 시어머니도 안 계시는데 며칠 더 있으라고 했지만, 경민의 술도 걱정이 되었고 마음이 머무르는것을 쉬이 허락치 않았기에 출산때 내려오겠노라고 엄마를 안심시켰다.
다음날 떠날때 가지고 갈 꾸러미들을 엄마는 열심히 챙기시는 눈치였다.
딸 둔 죄인이라는 말이 그르지 않다.
꼭꼭 서너번씩 끈 풀어질새라 여미는 엄마의 마음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고 그대로만 전달이 되어도 어머니와의 어긋난 감정은 그리 불편하지 않았을텐데....
예사롭지 않아 보였던 시어머니의 성격을 걱정하는 엄마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그저 모든것이 편하다고만 하였다.
특별한 효도라고 따로 해본적도 없는 나로서는 최소한의 효도라는 마음으로.
일찍 저녁상을 물리고 엄마와 텔레비젼 앞에 앉은 나는 갑자기 마당의 소음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귀에 익은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마당을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었다.
사돈집에 처음 왔는데도 나를 큰 소리로 부른다.
허둥지둥 엄마와 마당으로 나서니,
어머니는 허리춤에 양손을 걸친채로 분을 삭히지 못하는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인사고 뭐고 아무 형식을 갖출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다짜고짜 내게, 또 엄마에게 삿대질을 해가며 토해내는 언사는 우리로서는 지나가던 개한테도 그런 대접은 안할정도의 상스러운 언사였다.
"내 일찌기 본데없고 배운데 없는 년이라고 알아는 봤다만, 천하에 버르장머리 없는것 같으니"
어머니는 길길이 날뛰고 있었고, 그런 어머니 뒤에 몸을 돌려 뒤돌아서 서있는 시아주버니의 모습.
엄마와 나는 갑자기 닥친 혼란이 짐작도, 수습도 안되는 채로 시어머니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수 밖에 달리 할일이 없었다.
무슨 이유인가를 물어볼 정신보다는 엄마에게 모든 촉각이 세워졌다.
그리도 숨겼건만, 시어머니의 포악을 생생하게 들켜버렸다는 걱정만 들 뿐이었다.
종합하여 정리하자면 그랬다.
내가 경민의 전화를 받고 외출했던 날,
시아주버니가 퇴근을 하여 저녁이 준비되어 있지않아 굶었나 보았다.
그리고 아주 어른스러운 행동으로 그것을 자기 엄마에게 제수씨의 잘못으로 굶게 된것을 구구절절이 일러바쳐서 그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였다.
참으로 잘난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자식이 한끼 밥을 굶은것이 모녀의 가슴에 칼을 대는것 만큼의 가치를 매기는 너무나 잘난 사람들이었다.
엄마는 내용이 정리가 되자 그때까지 얼어붙은것 같았던 입을 떼어 같이 받아치기 시작하셨다. 그 작은 체구로 그렇게 큰 목소리가 신기할 정도의 큰 목소리로.
그건 사실 말도 안되는 억지였다.
무언가 일을 꾸미려고 작정하지 않는한 그런 사소한 일쯤으로 사돈집에 경우없이 쳐들어와 소란을 떨 일은 아무리 꺽어 생각해도 가당치가 않았다.
"그래, 말하자면 우리 현지가 사돈한테 이런 무경우를 받고 살았단 말이지?"
두 어머니들의 말투는 극을 치달렸다.
"딸을 시집보낼라면 갈켜서 보내야 할거 아냐?"
엄마는 나를 쳐다보았다. 순간적으로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저런 말이 나온것이 아닌가 하는 도움을 바라는 눈이었다.
내가 나서야 했다.
나 혼자만이 받아야 할 소나기라면 충분히 뼈속까지 젖어들 수 있지만.
적어도 엄마는 그럴 무경우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뒤에 서있는 시아주버니에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던졌다.
"아주버님! 그말을 일르려고 외가댁에 오셨어요?"
움찔하는 아주버니의 대답같은것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어서 어머니 모시고 돌아가세요. 이게 말이나 됩니까? 생각이 있고 눈이 있다면 빨리 돌아가세요"
나는 작정을 해야했다.
어머니가 경민을 우회적으로 공격하는것이 실패하여 직접적으로 나온다면 이것은 나의 문제였다. 내가 해결해야 할....
한참을 퍼대고, 엄마를 무시하고, 그러다가 시아주버니의 손에 이끌려 어머니는 돌아갔다.
그날밤,
나는 지난 8개월을 엄마에게 고스란히 내어놓았다.

엄마......
죄송해요.
현지는 이것밖에 안되네요.
아무리 아무리 애써서 내 딛을려고 하여도, 제자리 걸음이네요.
엄마 내 두발을 떼기가 왜이리 힘든거예요.

엄마는 밤새 부여잡고 계시던 마지막 담배를 끄며 단호하게 말하셨다.
"가지마라"
그 지옥과도 같은곳에 다시 가야만 한다면 사실 끔찍하였다. 엄마까지 건드려 놓은이상 나도 더이상의 인내는 힘이 들었으니까.
"엄마 애기가 있잖아"
"그런놈의 집구석이면 뻔하다. 내가 이서방을 믿었지만 평생 엄마 치마폭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하는 수 있냐? 이서방이 너를 따른다면 받아들이겠지만, 아닐때는 이대로 끝내자"
엄마로써 딸에게 헤어지라고 말하신다.
나는 배속의 아기 엄마이기 보다는 엄마의 딸이었다.
아직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