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괜찮다고 하여도 경민은 괜찮치 않은 모양이었다.
뱃속의 아이가 약한 발길질을 시작하고 옷 위로 둥실한 배가 태가 나기 시작하자 집안일이 조금 힘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여섯식구의 어른 빨래만 해도 수월치는 않았고,
칼자루를 쥐고있는 시어머니의 작정하고 괴롭히는 집안살림은 끝이 없었다.
세탁기로 빨래를 하면 옷감이 상한다는 이유로 네명의 아들들의 와이셔츠 빨래며 다림질도 내 손을 거쳐나가야 어머니는 흡족해 했다.
마음만 편하면, 육신을 놀리는 것 쯤이야 참을 수 있는데.....
경민에게 이상한 주사가 생겼다.
술을 먹으면 아무데나 쓰러져 잠을 잤고,
늦은 밤이든 새벽이든 파출소로 불려 가는 일도 잦았다.
그리고는 전혀 아무 기억도 못하는 경민.
경민과 속내를 터놓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두렵기는 했지만 아이의 태동은 내게 희망이라는 씨앗을 서서히 싹트게 하였다.
"경민씨, 자꾸 술 마시면 우리 서로가 힘들어"
이미 꺼진 담배불을 경민은 말없이 계속 부벼 짓누르고만 있다.
"내게 할 말이 있으면 해봐요"
그의 표정이나 행동으로 보아서 내게 딱히 할 말은 없는듯 하였지만, 귀밑머리 풀어 부부의 연을 맺은이상 나의 도리는 있을것 같았다.
"할 말 없어"
"아니야, 솔직해봐요. 혼자 그렇게 술을 먹지 않으면 안될만한 이유가 있을거 아냐!"
"그냥 힘들어서 그래, 술 줄일께"
"경민씨, 내게 말하지 못할만큼 큰 문제야?"
"절대로 현지 네가 신경쓸 만큼의 다른 문제는 없어"
미안해 하는 경민의 얼굴을 보니 더이상 다그칠 수 없었다.
"나하고 애기는 경민씨가 전부야, 혼자 힘들어 하지 말아요"
경민은 나를 꼭 안는다.
첫사랑의 진하의 품속은 너무 어렸다.
그와의 기억 모두를 차지하는 겨울 밤하늘의 카시오페아는 내 가슴속에 선명히 낙인 찍혀 있지만, 경민과 함께 하는 나는 생명을 잉태한 어른이었다.
그의 품속에서 생각나는것은 오로지 아이에 대한 걱정 뿐이었다.
이 남자의 품속은 생채기도 새살이 돋게 해주는 치유의 따듯함을 가지고 있구나...
안긴채로 경민의 체취에 눈을 감았다.
어머니가 내게 퍼붇는 그 포악은 한마디로 폭력이었다.
강자가 약자에게 휘두르는 정신적인 폭력.
그만 포기하여 갈때도 된 것 같은 시간이 흐르건만 이상하게도 점점 극을 향해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내가 옆에 있는데도 시아주버니에게 드러 내놓고 내 험을 하노라면,
시아주버니 역시 고개만 돌려 나를 흘깃 쳐다보는 것 이었다.
가난한 친정을 두어서 자신의 아들이 비빌 둔덕이 없다는 이유가 한가지 더 추가되었다.
상대하려고 들면 어느것 하나 억지가 아닌것이 없기에,
그냥 날이 갈수록 나는 배 불러오는 멍청한 바보가 되어가고 있는듯 했다.
술을 줄인다는 경민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자꾸만 되풀이 되었다.
경민 한사람만 보고 한 결혼이었는데, 그가 소홀해 진다고 생각하니 서운한 마음에 눈물을 비추는 날이 나역시 늘어갔다.
나는 날개잃은 갖힌 새였다.
내 의지대로 어느것 하나 하는게 없었고, 숨이 막혀오는 벽에 부딪힌것 같은 중압감으로 먹는것도 부실해졌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될것 같았다.
석달만 있으면 출산인데, 경민은 일주일의 하루만 빼고 혼수상태가 될만큼 술에 절어 살았다.
급기야 회사에서는 성실하지 못한 그에게 퇴직권고를 하였고,
경민은 다른 일자리를 알아본다며 잠시 쉬겠다고 하였다.
경민이 막상 집안에 들어앉자, 제일 효자라며 입이 침에 마르던 어머니의 안색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자신의 배 속으로 낳은 자식도 돈을 벌지 못하면 매정하게 내치는 잔인한 어머니였다.
제대로 한번 말대꾸도 안하는 경민의 옆에서 나의 입장은 그야말로 비맞은 강아지 꼴이었다.
경민이 방에 있는데 어머니가 내게 늘 하던식으로 몰아부치자 경민이 방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엄마 그만하셔도 현지가 알아들을거예요. 고정하세요"
그 한마디에, 어머니는 눈에 흰자 가득한채로 거품을 물며 경민을 옷 앞자락을 쥐어 뜯었다.
여편네에 눈이 멀어서 지 에미한테도 덤빈다며 경민의 몸 여기저기에 생채기를 냈다.
울고만 서있는 내게 화살이 또 돌려졌다.
널 만나기 전에는 말대꾸도 모르고 술도 먹을줄 모르던 애가 너같은 천한것 때문에 변했다며 입에 담지 못할 욕까지 얹어서....
"어머니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내 의사를 밝히는 최초의 말이었다. 시어머니랑 한집에 8개월간 살면서 처음으로.
어머니는...
나의 그 한마디에 세상에 둘도없는 악녀를 대하듯, 또 포악으로 경민을 쥐어뜯었다.
니가 날 버리든, 저년을 버리든 둘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