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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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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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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BY 아나스타샤 2001-09-13

외삼촌 쪽에서 연락이 왔다.
저쪽에서는 굉장히 맘에 든다며 엄마를 채근하는 모양이었다.
서두르는 엄마를 보며, 흠집있는 딸이 부담스러우신가 보다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한주가 지나, 그 사람이 다시 시골로 내려왔다.
가벼운 점퍼차림의 그는 집에 불쑥 찾아들어, 비위좋게 엄마와 아버지를 앉히고는 절을 올렸다.
일을 하던 중이라서 무릎까지 오는 장화에 몸뻬차림의 나를 보는 그사람의 눈빛에 따스한 애정이 담기는것을 보고는 그만 흠칫 놀라버렸다.
차린것 없는 밥상 앞에서도 그는 넉살좋게, 맛있다는 말을 연실 흘려가면서 먹는 모습에 엄마는 그저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셨다.
읍내에 있는 친척집에 가려 한다며 내게 배웅을 부탁한다.
그 배웅을 거절했다가는 엄마의 시달림을 한동안 견뎌야 할 것 같아서 올풀린 엄마의 두꺼운 스웨터를 걸치고 따라나섰다.
"저는 현지씨랑 결혼하고 싶습니다."
길가의 마른 죽정인 억새풀을 꺽어 만지작만 거릴뿐 나는 할말도, 할일도 달리 없었다.
"고운 현지씨가 이곳에서 이렇게 고생하시는것이 제 발길이 안 떨어지게 하는군요. 제가 부족하긴 하지만 현지씨를 평생 사랑할 자신은 있습니다"
평생 사랑한다고?....
후훗,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아요.
"다음주에 다시 내려오겠습니다. 가진것은 없지만 건강한 몸 하나로 현지씨 곁에 있고 싶습니다"
"저... 경민씨, 저는 아직...."
그는 말을 자른다.
"전 마음이 급합니다. 처음 만나뵙고 현지씨를 생각 안한적이 한순간도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 당장 사랑을 원하지는 않아요, 저랑 결혼해서 함께 하면서 사랑을 기다리겠습니다"
어두워 지겠다며 내 팔을 밀어 집쪽으로 몸을 돌리게 하고 그는 총총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며 경민이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그래,
내가 서울에서 있었던 2년간을 아는 사람은 없어.
그렇다고 진하랑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더 잘알고 있어.
배운것도, 딱히 할줄 아는것도 없는 내가 엄마가 원하시는 대로 따라주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거야.
좋은 사람같아 보였어.

내 스스로를 납득시킬 이유쯤은 얼마든지 더 붙일 수 있었다.
나는, 이른 새벽부터 오후 늦게까지 돼지 분뇨더미에서 허덕이는것에 서서히 지쳐갔고 내
운명의 어긋난 길을 아버지를 엮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집에 아버지와 함께 하는것이 분노스러웠다.
대문을 열고 들어갈때는 경민에게 해줄 답이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세번 만나고 결혼을 결심한다는 것은 그리 좋은 탈피는 아니었다.
친구들은 나의 조급함에 대해서 나무라지만 나는, 친구들처럼 최소한으로 지켜줄 가족의 보호아래 놓여진 소중한 딸자격은 없었다.
새해의 신선한 시작과 함께 모든것이 바쁘게 돌아갔다.
날을 잡고, 양가 어른의 형식적인 자리가 있었고, 경민의 식구들을 처음 보게 되었다.
아들만 넷 중의 둘째 아들인 경민의 윗형은 아직 미혼이었고, 결혼하면 함께 살 혼자되신 시어머니의 살가운 반김은 나쁘지 않았다.
집안의 몰락을 어느정도 외삼춘을 통해 들었다며 아무 걱정 말라는 시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은 이정도면 새로 시작해도 정말 나쁘지는 않다.
약간 의외의 반응을 보았다. 시어머니한테서.
예단을 넉넉히 준비 할 수 없는 엄마가 내놓은 두껍지 않은 돈다발을 시어머니는 엄마의 앞에 팽개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일어서서 나올 수가 없었다.
엄마가 가만히 계시니 두 어른을 놓고 내 감정대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구겨진 자존심도 결혼하면 다 옛말이 되리라.
솔직히 예단을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돈 아닌가.
시어머니로서는 둘째아들이라 하여도 첫 혼사이니 만큼 욕심이 있을거라는 이해를 엄마와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서로 쓸어내렸다.
결혼식은 몇십년만에 처음이라는 혹독한 추위속에 치르어졌다.
시골에서 올라온 친구들은 제대로 쉴 곳도 없이 숙식을 해결하고 신부화장을 하고 있는 미용실에서 만났다.
거울속의 나는.... 아름다운 신부였다.
내 몸속을 청진기로 대 보지 않는한 남들의 눈에 비추인 나는 순백색이 어울리는 행복한 신부였다.
미용실에 들어선 친구들은 내 곁으로 오더니 내 손을 잡고.....
지금 당장 집에 가자고 한다.
"응?"
화려한 백장미로 둘러싸인 면사포까지 쓰고 준비하고 있는 내게 집에 가자고?
"현지야, 이상해. 너의 시어머니 이상하신분 같아"
은경의 불안한 목소리가 조금 마음에 걸린다.
"저기서 시어머니랑 부딪쳤는데 우리가 친구라며 인사를 했는데도 받지 않았어. 이상해 현지야. 날씨까지 이러니까 느낌이 좋지않아"
괜찮다는 내 말에 친구들은 손을 잡아 끌며 집으로 가자고 재촉한다.
그때 가야 했을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