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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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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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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BY 아나스타샤 2001-09-12

동쪽으로 난 작은 창문으로 해가 걸려온다.
부우옇게 햇살 비추이도록, 친구들과 나는 밤새 웃다가.... 울다가... 그렇게 목이 메인채로 하루밤을 벌건 눈으로 새웠다.
진하는, 기어이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한다.
시험중에 심한 위복통으로 응급차에 실려나간 후로 의지를 꺽어버리고 어디 있는지, 어느곳을 헤메이는지 아무도 소식을 모른다고 했다.
나 없어도 자신의 몫을 챙기며 주어진 길을 잘 갈줄 알았는데.....
내가 진하의 앞날에 먹구름을 몰고 온것 같은 자책감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시골의 얇은 지붕을 뚫고 들어오는 추위도
내 마음속의 겨울에 비하면 그것은 추위도 아니었다.
눈감고 지내버린 2년의 나를 되돌리지는 못하지만, 엄마옆에서 ,겨울.... 봄....여름....그렇게 가축들과 씨름하며 한해를 지냈다.
아버지는 늘상 툇마루에 앉아 먼 산을 보며 꿈을 꾸는듯이 보였고,
엄마는 작은 몸을 부지런히 놀려 세식구의 입에 근근히 밥술 넘기는 소임으로 계절이 가는지, 오는지,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처럼 사셨다.
간간히 찾아오는 대학대신 직장을 선택한 친구들이 와서 하룻밤씩 나와 함께 하는것 외에는 나는 타인들과 부딪힐 일도 없는 적막한 일상의 반복인 생활.
돌아온지 일년이 채 안되었는데, 엄마는 사진 한장을 꺼내 놓고 내 앞에 바싹 다가 앉으셨다.
"현지야, 이 사람 한번 만나볼래?"
나는 사진보다는 엄마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착하고 좋은 사람이란다. 사진에서도 성격이 나타나는구만"
"엄마, 제가 어떻게 시집을 가겠어요"
내가 결혼을 하리라고는 단 일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이제 그만 웅크렸던 몸을 펴서 다른 세상을 꿈꾼적은 있지만, 당치도 않았다. 결혼이란것은....
"너 나이 어린데 구신으로 늙어죽을라고 하냐? 서울에서 있었던 일은 암도 모른다"
엄마는 내 손을 부여잡고 애원조로 바뀌셨다.
"그럼 한번만 만나보그라 이?, 한번 만나고 아니다 싶으면 내 암말도 않하마"
그래, 한번 만나는 것으로 엄마를 편하게 해 드릴 수가 있다면 그리 하지요....

서울에 사는 그 사진속의 남자는 주말을 이용하여 내가 있는곳 에서 제법 거리가 되는 읍내 다방을 약속장소로 잡았다.
외삼촌께서 평상시 지켜보았던 사람이라니까 엄마는 두말도 않으셨단다.
거울이 낯설었다.
윤기 잃은 내 피부는 거의 일년이 되도록 모르고 있을정도로 거울을 보는것도 두려웠다.
잊었던 화장품의 색조를 얼굴에 펴 바르고,
유행에 조금 뒤진듯한 코트를 몸에 꿰고,
너무 오랫동안 안 써서 먼지 뽀오얀 핸드백의 낯선 감촉을 가지고 다방으로 향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을 보니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것도 같지만,
이 시골에 눈이 오자면 족히 한달정도는 더 기다려야 한다.
내가 먼저 도착했는지, 다방에는 시골 노인들이 간간히 레지 아가씨들의 비위를 받으며 깊게 고랑패인 웃음소리로 가득차 있다.
상관없다. 지금 나오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건 나는 결혼을 하지 않을것이니까.
다방문의 쩌귀 틀어진듯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고개가 자연히 그쪽으로 향했다. 이 다방에 어울리지 않는 말쑥한 사내가 들어서고 있었다.
짙은 밤색의 양복이 하얀 얼굴과 맞물려 도회적인 분위기의 그는 두리번 거리지도 않고
내 앞으로 성큼 성큼 다가와 앉는다.
"안녕하세요?"
주변의 노인들과 빠글거리는 파마머리를 한 다방 아가씨들의 시선이 집중됨을 느끼며 나도 담담히 인사를 하였다.
별로 마음의 동요 없이 이 만남을 향해서 그런지, 편안하고 이질감 같은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결혼을 한다는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상대가 누구이건 도리가 아니었다.
그는 내게 호의적으로 대했고,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대신, 어스름한 저녁의 외출이 내겐 생기를 주었나 보다.
무심하게 첫 만남을 가지고 돌아온 나는 엄마의 기대에 찬 눈초리에 웃음으로 대답을 하고는 내 방으로 들어왔다.
소리 내어나가지 않도록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나는 길게.......흐느꼈다.
진하와, 태원의 얼굴들이 내 눈물에 흘러내렸고,
엄마와, 엎드려 울고 있는 내 자신이 흐느낌속에 삐져나왔다.
서러웠다.
무언지 모를 돌덩어리 같은것이 날 짓눌러, 숨조차 쉬지 못하는 암흑의 나락으로 육신을 내 던지는것 같은 ?㎲价淡?이를 악물며 울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있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세해 전의 막막했던 내게 그랬듯이 울고있는 지금 역시, 아무도 답해주지 않는 허공속에 나는 내 던져져 있었다.
이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