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념속에 잠겨있는동안 어느새,
상미의 호프집은 출렁거리고 있다.
거품내음 가득한 홀에는 취객들의 소요로 상미는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내가 앉은 자리는 그들과는 차단된 별세계처럼 출렁거릴 수 없는 미아가 된 기분으로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내 몸쯤은 오늘같은 날 잊어도 좋았다.
맨정신이 아니고 싶은 날은 바로 오늘같은 날이니까.
누군가가 짓누르는 듯한 어깨를 겨우 일으켜 세워 물기 뺀 호프잔을 들어 가득 채웠다.
술이 맞지않아 담배를 문 엄마의 체질을 닮아, 술이 조금만 과하면 온 몸에 마비가 오고 몇 시간씩 혼수상태에 빠졌던 예전의 한두번의 기억은 오늘쯤은 잊어도 좋았다.
천천히 맥주를 들이켰다.
오늘만 마시고,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마실일이 생기지 않을거다.
태원과 지냈던 이년간을 정리해야 할 오늘이라면 죽을생각이 없는한 술로 잠깐 정신을 놓 아도 내가 스스로에게 베풀 수 있는 극소량의 비상의 처방이었다.
어깨에 힘이 풀린다.
이완되는 근육을 따라 팽팽한 신경줄이 조금 더 느슨하여 제법 자조적인 웃음까지 띄게 한다.
나는 피하기 시작한 태원을 붙잡고 듣던, 그의 말에 소름이 끼쳤다.
그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전혀 틀리지가 않은데 시선을 맞추지 않는 태원의 외로 꼰 고개옆의 나는 소름이 끼친 채로 그저 멍.....하니 있었다.
"현지씨 미안한데... 도저히 안되겠어"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왕왕거린다.
"뭘? 내가 뭘 어떻게 했는데?"
"생각을 바구려고 애를 써 보았는데, 현지씨와 같이 있으면 다시 제자리가 되어버려서.."
"......"
무슨 이유일까!
무슨 생각, 무슨 이야기이길래 태원은 저리 뜸을 들이며 빙빙 돌리기만 하는걸까!
"진하...."
태원의 입에서 진하의 이름을 듣는순간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태원이 어떻게 그의 이름을 알 수가 있지?
그제서야 태원은 돌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는 쳐다보았다.
그보란듯한 태원의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어렴풋한 짐작....
"맞아 현지씨. 이유는 바로 그거야"
"이유가 진하 때문이라고?
무슨 말이든지 해야한다.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했다.
"나는 현지씨의 의식 에서 진하란 사람을 늘 느끼는데 이젠 지쳤어. 아니라고 하지마. 현지씨의 몸에서도 그사람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도 이젠 싫어"
어떻게.... 어떻게 알았지? 상미와 나 둘만이 알고있는데....
"태원씨, 누구한테 무슨말을 들은거야?"
태원의 눈에 조소가 깔린다.
차마 똑바로 보기 아까울 정도라던 그의 눈에 이제는 조소가 담겨져 나를 본다.
"현지씨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 했었잖아. 취직 축하 기념으로 술 마셨던날...."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날 속인거였어?"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나를 원한것은 먼저 태원이었다.
"내가 현지씨를 속인것은 아니지. 다만 괜찮을거라고만 생각했었지"
그의 깊이 패인 군데군데 널려진 얽힌 자국이 묘하게 틀어져 보인다.
나는 절대로 매달리거나 애원조의 말이라도 단 한순간도 하지는 않을거다.
다만, 시간은 조금 필요하였다.
태원은 내게 더이상의 말이 나오지 않자 문을 거세게 열고는 나가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