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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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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BY 아나스타샤 2001-09-02

그는 항상 500cc를 시켰으며, 혼자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기도 했고, 컵에서 흘러나온 물방울들을 모아 탁자위에 낙서를 하기도 했다.
상미는 어느새 그와 말을 텄고, 다음 차례는 자연스레 내가 되었다.
김태원,
같은 나이,
은행원,
무녀독남,
양친부모,
손님이 한갖지면 셋은 한 테이블에 함께 하기도 했다.
태원은 수줍어 했고 내게 말을 할때는 눈을 맞추지 않았다.
그에게서 내게 향하는 훈풍의 내음......
"나는 늘 현지씨가 궁금했어요. 맥주잔을 앞에 놓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낮동안은 무얼 하시는지..... 현지씨를 낳아주신 분은 어떤 분들이신지...."
상미의 눈빛에 장난기가 도는것을 보며 웃음이 나오려는것을 억지로 참았다.
"저는 지금 직장을 구하고 있어요. 상미의 집에서 함께 기거해요"
태원의 몸이 내쪽으로 기울어진다.
내게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표시이던가, 아니면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리라.

거짓말처럼 그는 손쉽게도 내가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해서 달려왔다.
내 혼자몸이 한달을 넘게 애써도 안되던 것이, 그는 하루만에 가능했다는게 허무해져 버렸다. 그날 저녁, 우리 셋은 상미의 공짜술에 웃음소리 크게 떠들며 축하파티를 했다.

엄마를 모셔오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날 태원의 고마움에 취해서, 나는 주절주절 많은 보따리를 풀어놓았나보다.
상미의 집에 얹혀살게 된 시골의 엄마 아버지 이야기며.....
첫사랑의 이야기며....
내가 그런 이야기를 풀었다는것을 나는 토씨하나 안 바꾼채로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의 입에서 듣게 되고서야 알았다. 그날밤 내가 기쁨에 취해 감정의 조절이 힘들었었나보았다.
태원은 내친김에 집에서 돈을 취해, 내게 자그마한 방도 마련해 주었다.
상미의 올케를 견딘다는 것은 사실 더이상 불가능했다.
그것은 상미를 위해서도 내가 거적을 덮는한이 있어도 있을자리가 아니었던 시기이기에
나는 태원의 호의를 마다할 염치따위는 던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촌뜨기 사회인이었다.
태원의 저녁시간은 늘 나와 함께 보냈다.
상미외엔 달리 아는이 없는 내게 태원은 훌륭한 친구였다.
물론,
나는 태원의 저음인 목소리에서 늘 진하의 목소리가 들리는 이중의 환청에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다. 진하는 늘 나를 보살펴주고 있었다.
태원의 의기양양한 걸음걸이 옆에서 나는 진하를 생각하며 걸었다.
진하는 대학생활의 시작으로 나쯤은 잊은것이 아닐까.
그러나 태원은 너무 가까이 있었고, 태원의 공세는 달콤한 안락쇼파와도 같았다.
너무나 푹신해서 몸은 길들여져, 불과 한두달 전의 나로 다시 돌아가라면 어떻할까 하는 조바심마저 일 정도로...
사람들은 태원과 나를 번갈아보며 흘깃거렸다.
예전에, 진하와 내가 걸을때 흘깃거리던 그런 눈빛들이 아닌, 나를 보며 혀를 차는듯한 눈길로 훑었다.
태원은 나와 함께 걷는것을 아주 행복해 했다.
옆으로 비추어진 벌어진 그의 두툼한 입술사이로 흘러나오는 허밍은 그의 행복을 들려주는 소리였다.
안락한것이 왜 행복한것이 안돼는거지?
스무살의 나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왜 아무도 내게 말하지 않은걸까.
나는 왜 그런 판단력도 없었던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