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를 위해 아버지가 평생 한 일이 무엇인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다아 성숙한 여인의 몸을 가졌음에도 교복에 쌓인 감성은 풀벌레와도 같았다. 굴러가는 가랑잎에도 우리는 정말로 웃음이 나왔다.
어쩌다 길거리 간판에 맞춤법 틀린 메뉴를 보아도, 우리는 허리가 휘어지도록 웃었고,
바람소리 가득찬 내 마음은 가을하늘의 푸른색이었다.
일은 고되었지만 집안은 걱정이 없었고, 진하를 생각하면 늘 가슴속에선 아지랑이가 모락 모락 피어올랐다.
녹슨 철대문을 밀고 집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담장너머로 기웃거렸고,
두세개의 보따리와 함께 엄마는 회칠로 반들거리는 마당에 주저앉아 통곡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두꺼비처럼 눈만 껌뻑거리고....
집안의 모든것은 빨간 벽지로 기하학적인 도배를 하듯, 여기저기 빨간색이 널려있었다. 축사에도, 심지어는 엄마의 리어카에도....
건질것도 없이, 우리는 세식구 몸만 나와야 했다.
철저하게, 아버지는 모든것을 넘겼다. 집안 세간살이까지 일체 넘기겠다는 각서와 우리 인생을 바꿔치기 한 것이다. 그 잘난 실력의 노름으로...
세식구는 여인숙의 방 한칸을 빌어,
연탄화로 하나에 밥을 앉혀 그렇게 끼니를 때웠다.
난 벗어나야 했다.
내가 있을곳은 그 천정의 벽지 무너져 내리는 여인숙은 적어도 아니었다.
진하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더이상의 나를 내보일 수는 없었다.
이태껏 만으로도 충분했다.
구질구질한 나를 스스로도 참기 힘들었는데, 내 사랑하는 친구들과 진하에게 이해되고 싶지도 않았다. 난, 거의 나를 포기했다.
진학을 포기하고,
친구들이 버스를 대절해 예비고사를 치르러 타도시로 떠나는 시간, 나는 여름내 햇볕을 차단하느라 내린 커텐뒤에서 아버지에 대한 저주를 다스리지 못하는 눈길로 친구들의 모습을 훔쳤다.
커텐뒤에서 이글거리는 나는 날개잃은 새의 주검과 같은 헌신짝인 현실이었다.
하하! 꿈이나 희망은 필요없었다.
나는 여인숙 방만 벗어날 수 있다면, 몸도 팔 수 있었다.
온 거리가 출렁거리는 크리스마스. 진하를 만났다.
수척해진 진하와 나는 서로 다른 고민임에도 불구하고, 진하는 들떠있었다. 실반지 하나를 내 손에 끼워준다.
"현지야, 이건 나야. 내가 널 손에서 지켜줄거야"
나는 그에게 줄것이 없었다. 진하와의 약속장소까지도 오래오래 걸어서 와야 할 정도로 내 주머니는 비어있었다. 나도 선물을 사고 싶었는데....
진하를 끌었다. 인적없는 12월의 숲속은 이 부딪힐 정도로 추위가 엄습했고, 푹석거리는 마른 나뭇잎의 감촉은 이를 악물게 했다. 우리는 아직 손도 잡아본 적이 없는 풋내기였지만 내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아 가슴에 품었다. 떨리지는 않았다.
한치앞의 앞날도 모를 내게 가장 소중한것을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해야 한다는 생각외엔...
"난 지금 너의 여자가 될거야"
진하는 놀라 뒷걸음질 치지만 나는 옷속에 넣은 그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진하야, 내 마음을 받아줘. 난 지금 네게 내 마음을 주는거야"
서툰 우리는 부끄러운 첫 의식을 치렀다.
누워서 바라본 겨울하늘엔 카시오페아가 쏟아져 내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카시오페아에게 빌었다.
"하늘이 있다면 우릴 갈라놓지 않을거고, 하늘이 날 버린다면, 우리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지켜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