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작업복과 일상복의 구별이 없는 농촌생활이지만 주섬 주섬 장갑과 수건.모자를 챙겨들고 내려서려다, 아직까지 일어날 기척도 없는 마누라 생각에 새삼 부아가 치민다.
손에 들었던것들을 도로 내려놓고 방문을 연채 빨리 일어나라며 소리친다.
그소리에 잠이 깨었는지 막내딸 해자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두리번거리다가 마루로 나오는데도 애들 엄마는 꿈쩍도 않는다.
"이눔의 여편네야! 내말안들려,빨리일어나지 못해? 동네 가문테서 남들 다 일하는데 남사스럽게 뭔 큰일했다구 여태까지 퍼지구 있어. 아침부터 이걸 그냥..."
버럭 소리를 지르니 아직까지 잠이 덜깬 해자가 제아버지 목소리에 놀라 입을 삐죽삐죽하며 얼른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그제서야 마누라는 부시시 일어나, 우는 해자를 옆으로 돌려 앉힌다.
억지로 일어나게 하고 집을 나서지만 맘이 편치않다.
복수엄마만 꿈에 나타나지 않았어도 이렇게 심정이 사나울리는 없는데 애맨것한테 화를낸것같아 마음이 언짢다.
다른여자들은 한참 살림에 손이 익는 사십대라지만 애들엄만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는데다 게으르기까지 하다.
게다가 쓸데없이 욕심이 많고 우묵스럽기까지 해서 동네 아주머니들한테조차 인심을 못얻고 있으니 여간 걱정이 아니다.
환갑을 넘긴지 올해로 사년째가 되는 복수아버지는 요즘 조금만 무거운걸 들어도 팔다리가 후들거린다.
요새같은 땡볕엔 장정들도 일을 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는데 몸 피곤하다고 일을 놓을수도 없는 처지이니. 내 한몸이야 언제 죽으나 여한없고 마누라야 또 어디간들 밥 굶으랴만 아직 어린 세딸, 마음이 편치 않은건 모두 그때문이다.
이번 여름휴가때 복수가 다니러 오면 애들일좀 상의해 보아야 겠다고 생각한다.
무슨복을 받으려고 뒤늦게까지 이고생인지 모르겠다.
모두 내팔자려니 해도 요즘 들어 부쩍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워 진다.
복수엄마 죽었을때 복수데리고 혼자 살던지 아니면 나좋다고 은근한 눈길주던 새마을집 주천댁하고나 의지하고 살걸, 그놈의 아들하나 보자고 욕심을 냈던게 화근이었다.
마을에 생선이며 건어물을 이고 곡식을 바꾸러 다니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조금 변변치 않지만 전 남편한테서 아들을 내리 셋이나 낳고 혼자된 여자가 있는데 어떠냐고 했다.
아들을 잘 낳는들 제정신으로 아들을 키울까 싶어서 거절의 뜻을 비췄더니 중매쟁이는 단지 셈이 좀 서툴고 말을 똑부러지게 못할뿐 겉모양은 멀쩡하다고 했다.
게다가, 누가 가진것없고 나이많은 홀아비한테 시집을 오겠냐고도 했다.
사실 만나고 보니 얼굴도 그닥 밉상은 아니었고 몸도 두리뭉실하니 아들욕심이 제일먼저 들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삼십이 갓 넘은 여자를 감지덕지라는 말까지 듣고 결정을 해버렸다.
그리고 그땐 복수엄마 죽고 십여년동안의 홀아비 생활이 지겨울때 술김에 저지른 일때문에 한동네사는 주천댁하고의 사이가 서먹할때였고, 야간 산업체 특별고등학교를 다니는 복수가 집을 떠나있어 매우 적적한 때였다.
밭에 가니 벌써 이장은 두 고랑을 뜯어나가서 셋째 넷째 고랑을 뜯으며 되돌아오고 있었다.
일할땐 마주보고 하는것보다 나란히 해야, 말동무도 되고 능률도 오른다는걸 아는지라 셋째골에 들어서서 한잎두잎 뜯으며 마중을 나간다.
"형님, 그냥 뜯어서 차곡차곡 모아 놓기나 하세요. 일곱시면 애들이 온다니까 그애들보고 나르라 하지 뭐. 사실 애들이 도와준다고 하지만 지네가 농사일을 제대로 하기나 하겠어요?
그냥 밭에 젊은것들이 있으니까 심심하진 않겠구나 싶어서 선뜻 오라고 한거지요"
담배를 뜯는건 사실 쉬운게 아니다. 복수 아버지도 처음엔 담배 뜯는법을 몰라 밭 주인들한테 혼께나 났었다.
담뱃잎에 물이 너무 올라 마른잎이 되면 건조실에서 한번 쪄낸후에는 군데군데 불에탄것처럼 시커멓게 되어서 못쓰고, 또 물이 안오른건 푸른기가 돌아 버려야 한다.
적당히 물이 올라 푸른기를 약간 띤 연한 노란색이 되어야 알맞은 색깔이 나온다. 그래야 돈을 제일 많이받는 일등품을 받는다.
그렇게 적당한 색을 찾기가 처음엔 쉽지 않았다.
담배농사 20년이 넘은 지금에야 손으로 만져 보기만 해도 그 느낌을 알정도가 되지만 말이다.
사람 키만한 담배 꼭대기 부분은 이른 여름 햇살에 벌써 시들해져 가면서도 진 때문에 여간 성가신게 아니다. 밑부분은 이슬이 증발되느라 내뿜는 습기와 담뱃잎에서 나는 특유의 매운 진 냄새가 고개를 숙일때마다 후끈하며 코끝이 저릴만큼 달아오른다.
밑에서 부터 두닢씩 이쪽 저쪽 번갈아 가며 차례로 뜯어서, 왼쪽팔 위에 차곡차곡 올려놓자 몇발안가 금새 한 짐이다.
예전같으면 서너자 올려놓고도 거뜬했었는데 몸이 이렇게 망가지다니 이장 말대로 담배 다뜯어 놓으면 제일먼저 보건소에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지난 곳간은 색이 잘나와서 기분이 좋더만 오늘것은 웬지 그렇네요. 날이 너무 뜨거워서 그런가. 이번엔 괜히 기름만 없애는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장이 팔에 얹고 있던 담뱃단을 놓으며 말한다.
"그래도 이동내선 이집 담배가 젤로 좋구먼. 담배모종할땐 하도 작아서 제대로 살까 걱정되드만 고추밭하고 땅을 바꿔 심길 잘했어."
"잘돼야 올핸 몇푼 건지겠어요? 양담배 잘팔리지, 미국에선 대통령이 담배도 마약이라고 한다던데 남들이 나쁘다는걸 심어서 먹고 산다는것도 그렇고...내년엔 딴걸 좀 해보든가 해야겠네요. 나이 한살 더먹으니 이 땡볕에 담배 뜯는것도 힘에 부치고. 아이구, 내가 형님앞에서 엄살이 심했네. 허허허..." 이장이 멋적게 웃으며 허리를 펴다가 어? 저놈들 벌써오네 한다.
이장 말대로 오랜만에 젊은 애들이 밭에 오는게 반가워 일어서려는데 현기증이 나서 그대로 주저앉는다. 그바람에 담뱃잎 몇장이 뚜두둑 하며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평소 같으면 심상치않은 복수아버지의 행동에 관심을 둘 이장이지만 조카를 반기느라 별 신경도 쓰지 않는다.
조카와 그 친구가 꾸벅 인사를 한다.
"오냐, 일찍 왔다. 근데 오늘 너희 고생좀 해야겄다. 고모부라고 어설프게 일시키고 대충 도장 찍어주는 건 못하니까 단단히 각오해라." 이장이 웃으며 하는말에,"이사람아 괜히 겁주지 말게나. 요즘같은 땡볕엔 그냥 앉아있어도 땀이 주르르 흐르는데 밭으로 나온것만도 신통하구먼. 근데 쟈가 어떤 조칸가?" 얼굴을 보니 눈에 익는다.
이장네 큰처남 상택이의 아들이란다. 방학때마다 누나네 다니러 오곤 하더니 그새 저만한 아들을 두었나 싶다.
"니들은 밭고랑으로 다니면서 담배뜯어놓은거 차곡 차곡 경운기에 싣거라. 담배가 끈적하니까 지나 다닐때 뿌러뜨리지 않도록 조심허고. 경운기에 실은담엔 햇빛안보이게 가마니로 살짝 덮어놓거라." 이장의 말에 두놈이 예-하더니 누가 먼저 하나 내길 하면서 부지런을 떠니 조용하던 밭이 활기가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