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잠은 깨었지만 선뜻 일어나 앉기가 힘이든다.
평소엔 다섯시도 되기전에 저절로 떠지는 눈이 오늘은 눈꺼풀에 풀이라도 발라 놓은듯 무겁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불을 켜려는데 발치에 뭔가가 걸린다.
더듬더듬 손으로 만져보니 이불뭉치다.
댓평되는 방에 세 딸과 마누라가 이리저리 사방 뒹굴며 자다가 필시 더위에 차냈을 것이다.
형님... 급하게 일어서려는데 다리에 힘이 쫘악 빠지며 그대로 주저앉는다.
한손으로 무릎을 짚고 끙...하며 힘을 주고 일어서서 불을 켜니 벌써 여섯시가 다 되어간다.
벌써부터 이렇게 더우니 한낮엔 또 어제만큼 맥을 못추겠지 싶다.
"형님, 일어나셨어요. 접니다."
다시한번 부르는 소리를 들어보니 이장인 민숙 아버지다.
"어...일어났네. 옷좀입고..."
주섬주섬 윗목에 벗어놓은, 바짓단이 돌돌 말린 바지를 꿰어입고 방문을 여니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마루에 이장이 앉아있다.
밖은 벌써 훤하다. 오히려 밖으로 나오니 방안보다 시원하다.
"피곤하신가봐요. 몇번이나 불렀는데도 못일어나시고"
"원, 당최 더워서. 간밤엔 새벽까지 어떻게나 덥든지 자다가도 몇번을 깼네그려. 오늘도 날이 엄청스럽겠어"
"그래 말이래요. 며칠동안 이모양이니 뭘해도 힘이 안나네요.그래도 형님, 오늘 담배를 꼭 뜯어야겠어요. 일기예보들으니 내일은 비도 온다는데 괜히 비그치고 뜯으면 물만 먹어 색도 잘 나지 않으꺼구...또 오늘 조카 녀석이 즈이 친구하고 일해주러 온다니까 좀은 수월하겠구먼요."
"조카가 몇살인데...착하구먼"
"뭘요, 고등학교 일학년인데 요즘은 봉사활동이라는 과목도 생겼다네요. 이왕 해야하니까 점수도 올리고 도와도 주고...나야 좋지요.
근데 얼굴이 많이 부으신것 같네. 어디 편찮으신거 아닌감유?"
이장이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묻는다.
더위탓이겠지,하며 핑계를 대니 이장이 보건소에 다니는 자기딸 민숙이한테 일러 놓을테니 보건소에 가보라고 한다.
사실 요즘은 밥맛도 없고 소화도 잘안되고 하니 남이 보고 얼굴안좋다는 말을 많이한다.
시골에선, 건물부터가 높고 침침해서 보기만해도 겁을 먹는 종합병원보다 시골 면사무소만한 보건소가 약값도 싸고 만만하다.
이장을 밭으로 먼저보내고 복수아버지는 마당에 있는 펌프를 올려 물을 몇번 퍼낸다음 한바가지 받아 마신다.
요즘같아선 입에 들어가는것 모든것이 탐탁치 않더니 약간 쇳물냄새가 나는 물맛은 꿀맛이다.
세수대야에 물을 받아 머리를 담그고 잠깐 있으니 묵지근하던 머리가 조금은 나아진듯도 하다.
"이봐, 수건좀 내줘"
방안에 대고 소리를 치니 아무대꾸도 안한다.
"야! 수건달라는데 안들려? 밖에 사람이 와서 떠드는데도 안일어나고 뭐하는게야."
다시 소리를 버럭 지르니 그제서야 방문만 조금열린채로 꾀죄죄한 수건만 쑥하고 나온다. 어젯밤 하도 더워서 목물하고 들어와 닦다가 획하고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아직도 축축하니 물기가 있는 수건이다.
저걸...울화가 치미는걸 간신히 참고 대야에 물을 담아 수건을 대충빨아 얼굴을 닦는다.
마루에 걸터앉아 분유통을 끌어당기는데 수전증있는 사람마냥 손이 덜덜 떨린다. 분유통안에, 이장내서 가져와 잘게 썰어 담아놓은 연초와 농민신문을 직각으로 오려 고무줄로 동여놓은, 애 손바닥만한 신문지 뭉치가 있다. 담배를 종이에 말아 불을 붙이는데 간밤에 꾼 꿈이 생각난다.
머리가 이렇듯 무거운건 더위탓도 있지만 간밤의 그 꿈때문인것도 같다.
복수엄마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방안에 수줍게 앉아있었다.
아마도 물한그릇 떠놓고 예를 올리고 동네사람들한테 국수나 대접하던 그때인것 같았다.
복수엄마 옆에는 새마을집 주천댁이 부러우면서도 약간은 시샘하는 눈으로 복수엄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만보니 주천댁도 한복을 입고 있었다.
마당에는 동네 남자들이 왁자하게 술을 마시고 부엌에선 동네 아주머니들이 떡이며 부침이며 고기를 접시에 부지런히 담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방안에 들어서니, 방 한구석에 커다란 호랑이 한마리가 방안으로 들어서는 자신을 쳐다보며 앉아있었다.
꼭 그 호랑이가 복수엄마를 어떻게 할것같아 내?으려고 사람들을 부르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그러자 호랑이는 복수엄마와 주천댁이 앉아있는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가는것이 아닌가. 너무나 놀라 사람들을 부르러 밖으로 나가니 그많던 사람들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없다. 너무 막막하고 서러워 울음이 나오는데 목이 꽉막혀 답답하기만 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니 복수엄마는 간데 없고 주천댁이 호랑이를 품고 앉아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