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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BY 녹차향기 2001-07-16

(2)
여자는 자기가 흘린 식은 땀이 목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오른손을 휘휘 저어 보았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여자가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그렇게 손을 공중에 대고 그어 보는 것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식당 일을 하러 나간 시어머니가 다시 돌아오려면 밤 12시가 조금 넘어야 했고, 아직 시계는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먹는 둥 마는 둥 조반을 마친 후 약 한 봉지를 먹고 잠에 빠져 들었고, 점심도 거른 채 오후 나절까지 헤매고 나니 여자에게 남아있는 기운이 있을 리 없었다.
치욕스럽다.... 사는 게 치욕스럽다고 몇 번을 입 속에 되뇌이는 동안 여자의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날개가 달려만 있다면야 창문을 열어 놓고 얼마든지 훨훨 날아가 볼 테지만 여자에겐 날개가 없었다.
날개 대신 세상을 향해 날아갈 수 있는 비행기표라도 있으면 얼마든지 다른 세상으로 날아갈 테지만
여자에겐 비행기표를 살 수 있는 돈도 없었다.
비행기를 탈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여자는 그것이 또 서러워졌다.
서럽다고 생각을 하기로 작정을 하니 모든 것이 참 희미해졌다.
희미해지는 삶을 부여잡을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있기라도 한 걸까?
얼마큼 더 살아 봐야 그것이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며 용기를 주고 의욕을 주는 걸까?
의욕을 내야겠다고, 삶의 끈을 놓아 버린다면 어디서 이런 세월을 보상받을 것인지 여자는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식은 땀이 온 몸을 눅눅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는 샤워를 하러 목욕탕 문을 밀었다.
언젠가 남편이 목욕탕에서 온 몸에 비누 칠을 하고 부연 거울을 손으로 쓱쓱 문질러 면도를 하던 모습이 얼핏 떠올랐다.
그리움이란 이런걸까?
보고 싶을 때 그 사람이 내 곁에 없고, 만지고 싶을 때 그 사람을 만질 수 없다는 것이 그리움일까?
뜨거운 물의 수증기가 목욕탕 안을 꽉 차도록 여자는 오래오래 더운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밑에 서 있었다.

샤워물 소리에 전화벨 소리가 섞여 들렸다.
잠시 물을 잠그고 다시 귀를 기울이니 찌르르르..찌르르르..벌레 울음 소리처럼 전화벨 소리가 거실에 퍼지고 있었다.
여자는 수건으로 몸을 둘둘 말고나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수화기 건너에 있는 사람에게서 나는 맑은 느낌, 틀림없이 남편이었다.
이렇게 이따금씩 '말없음'을 알려주려 전화하는 사람은 남편 밖에는 없었다.
잔잔한 호흡만이 들려올 뿐이지만, 남편이 이렇게 '말없음'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려주려 하는 것이라고 못내 미안한 마음을 전하려 하는 것이라고 여자는 그렇게 막연하게 짐작만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전화엔 고요와 안정, 흐트러지지 않은 단정함, 바람냄새와 혹은 바다냄새같은 것이 느껴졌다.

"당신이예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여자가 떨리는 심장의 박동수를 죽이며 흐느끼듯 물었다.
"당신이냐구요?"
"................"
더 오랜 침묵이 흘렀다.
여자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진 물이 바닥에 홍건히 고였다. 으슬으슬해지는 어깨엔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뭐라고 한마디 말이라도 해 주면 안되나요? 당신이 어디있는지, 왜 그렇게 살고 있는지 한마디만
해주면 안되나요? 나는 뭐죠? 당신에게 있어서 나란 사람은 어떤 존재죠? 이렇게 아프게 해주려고 결혼했었던가요? 내 인생이 어떻게 된거죠? 당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나 알아요?"
".........미..안..하다."
예의 굵직하고 낮은 음성의 그가 꺼낸, 남편이 몇달만에 꺼낸 첫마디는
미/안/하/다 였다.
그래,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전화를 했었던 거구나...
여자는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물은 이렇게 가끔 소리내어 울지 않아도 저절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은 여자가 결혼을 하고 나서
알게 된 세상일 중에 하나였다.

젖은 몸에 젖은 눈물, 젖은 생각과 젖은 세상,
여자에게 보송보송 말라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잠시후 남편이 조용히 딸깍이는 소리와 함께 마치 가위로 선을 잘라내기라도 한 듯 전화를 끊었고,
여자가 들고 있는 수화기에서는 뚜뚜뚜뚜...뚜뚜뚜.. 응급실에 울려퍼지는 빨간 벨소리만 흉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