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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BY 녹차향기 2001-07-13

여자는 뜨거운 것이 귀를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손을 대어보니 찐득할 것 이란 예상과는 달리 아주 맑은 물같은 짓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면봉을 귀에 갖다 대었다.
그리곤 조금 깊이 면봉을 귓속에 넣어 차분하게 귀를 닦아내었다.
벌써 이렇게 귀를 닦아내는 것이 얼마나 오래 되었던가?

여자는 서랍에서 연고를 꺼내 면봉에 가볍게 묻힌 후 또 귓속에 면봉을 밀어넣었다.
어떤 세상 소리보다 그 소리는 부드럽고 차분하게 여자의 신경을 자극하였다.
뒷덜미 어디쯤에 가는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듯한 전율이 느껴졌다.
휴지통에 면봉을 밀어넣으며 여자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3시 5분,
일어나기엔 너무 이르고, 다시 자리에 눕자니 잠이 쉬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건너편 아파트 동에 딱 한 집만이 불이 켜져 있을 뿐이었다.
저 집 사람들은 왜 잠에서 깨어난 걸까?
혹시 나처럼 귀가 아파 일어난 사람일까?
어떤 사람에게나 자다가 벌떡 일어나 치료할 아픔이 얼마큼씩 다들 존재하는 걸까?
여자는 하늘이 부우옇게 밝아올 때까지 이리저리 뒤척이다 설핏 잠에 다시 빠졌다.

부엌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에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이른 조반을 짓는 시어머니의 쌀바가지에서 사각사각 마른 모래사장을 걸어다닐 때의 모랫소리같은 것이 일정한 리듬으로 흘러나왔다.
여자와 달리 어머니는 바가지 바깥으로 행여 한 톨의 쌀이라도 떨어질까 조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쌀을 잘 헹구어 내었고, 손끝에 들어간 적당한 힘 때문에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제 1번을 떠올랐다.
허겁지겁 여자가 부엌으로 들어서는 것을 시어머니는 뒷모습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괜찮다."
짧막하지만 단호한 대답이 오히려 여자를 더 주눅들게 하였다.

여자의 한 손이 다시 오른쪽 귀로 올라갔다.
귓바퀴에 진득하게 진물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작은 체구지만 잔병치레도 없이 운동장 열바퀴를 거뜬하게 돌아오는 시어머니와 달리 여자는 병약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감기 몸살은 기본으로 앓아야했고, 수시로 머리가 아픈 통에 진통제가 늘 서랍에 그득하였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고등어가 소리내며 쫄아 들고 있었다.
짭조름한 간장냄새가 집안에 금세 베었다.

몇 개 반찬을 내놓고 시어머니와 마주 앉아 밥을 먹던 여자는 알 수 없는 한기가 온 몸을 엄습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 한기는 으슬으슬 추운날 냉장고 문을 열 때 발등위로 한꺼번에 쏟아지는 냉기 같은 거였다. 남편도 없는 집에 시어머니와 단 둘이 마주 앉아 먹는 밥이 제대로 목을 타고 넘어갈리가 없다. 적어도 여자에겐 그랬다.
남편이 집을 나갔던 것이 벌써 언제적 일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 해진다고 생각하니 울컥 가슴에 답답함이 차올랐다.
귓바퀴에 묻은 채 말라버린 짓물만큼이나 여자의 눈에선 눈물이 메말라가고 있었고, 메말라 가는 눈물만큼이나 세상에 대해 여자는 문을 잠그고 있었다.
한기가 점점 심해진다고 생각하면서 여자는 모래알 씹듯 어렵사리 밥알을 삼키고 있었다.

"왜 밥 먹는 모양새가 그렇냐? 억지로라도 자꾸 먹어야지. 그럼 못쓴다."
어머니의 몇마디에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수저를 들었던 손목에서 힘이 빠져나가면서, 여자는 물컵을 끌어다 억지로 몇모금 물을 넘기면서 함께 밥을 넘겨버렸다.
먹는다는 행위가 가끔은 치욕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굶기를 작정한다면 언제든 모진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던 탓일지도 몰랐다.
"몸이 영 좋질 않네요. 조금 추워요."
자리에서 일어나 씽크대에 수저를 넣으며 여자는 먹다 남은 밥을 어떻게 할까 ...잠시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먹다 남은 밥처럼 지저분하게 보이는 것이 있을까?

입속의 침이 분해효과를 일으켜 어쩐지 녹아내린 듯 보이는 밥풀들에 조금 남아있는 반찬들의 흔적들이 가끔은 사람들을 대신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깔끔한 사람은 밥도 그렇게 남긴다. 아예 남기기 전에 덜어먹기로 작정하기 때문에 남기는 일 따윈 하진 않는다. 욕심 사나운 사람은 무조건 끌여당겨 밥을 먹은 후, 배가 불러지면 그때서야 돼지밥통처럼 옆으로 밀어내 놓는다.
거기에 남아있는 벌건색의 김칫국물들이나 혹은 이런저런 반찬들의 흔적조차 아무렇지 않게 붙어있는 것을 볼 때마다 여자는 비위가 돌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됨됨이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여자는 남은 밥을 수채 구멍에 밀어넣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