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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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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BY dlsdus60 2001-06-16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인호는 목이 타 들어가는 갈증에 어두운 방바닥을 더듬었다.
균호는 깊은 잠이 들었는지 꿈쩍도 않았고 자신이 지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호는 자신이 언제 옷을 벗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고
어렴풋이 꿈속의 일들이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인호는 잠들어 있는 균호의 몸을 흔들었다.

"왜 그러세요? 자지 않고..."

인호는 예상치 못한 여자의 목소리에 놀라 뒤로 물러나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순간 박동 하던 심장은 덜컹 내려앉았고 졸던 잠이 화들짝 깨어났다.

"야, 균호야!"
"아저씨, 왜 그러세요? 피곤해 죽겠는데 얼른 자요!"

여자의 목소리에 놀라 인호는 방을 두리번거리고 더듬어 보았지만 무거운 정적만 흐르고
균호의 인기척은 없었다.
자신의 곁에 누워있는 사람이 균호가 아닌 여자라는 것을 확인한 인호는 황급히 이불을
끄집어 발가벗은 몸을 가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벗어진 옷들을 찾았다.
창틈으로 스며드는 흐릿한 가로등 불빛에 하얀 속옷이 미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인호는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 듯 옷을 집어들고 서둘러 가랑이 사이에 팬티를 끼우고서
웃옷을 걸쳤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인호는 균호와 잠든 이후의 일들이 아무리 기억을 해보려 해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한참 동안을 돌부처처럼 앉아 있다가 인호는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나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희뿌연 방문 옆에 앙증맞게 붙어있는 스위치를 누르자 쌓인 먼지를 털어 내는 듯이 형광등은
번뜩거리며 시린 눈을 자극하였다.

"이 봐요, 아가씨! 일어나 봐욧!"
"아이 차암! 한번이면 됐지 또 할려구요?"
"뭐라구요? 지금 무슨 얘기하는 거예요?"

여자는 잠을 깨우는 인호를 몹시 못 마땅해 하며 비스듬히 일어나 앉았고 인호는 짜증스럽게
내 뱉는 여자의 말에 가슴이 답답했다.
인호는 더 이상 낯선 여자의 얼굴을 쳐다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묻고 싶지가 않았다.

"아가씨, 가세요. 빨리욧!"
"이 아저씨 웃긴 아저씨네,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재수 없게 새벽부터..."

여자는 주섬주섬 겉옷을 챙겨 입더니 휑하니 방문을 열고 나가 버리고 여자가 걷고 있을
골목길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급하게 뛰어가는 발소리가 멀어지면서 호루라기 소리도 멀어졌다.
호루라기 소리는 어릴 적 인호가 불던 호루라기 소리와는 또 다르게 들렸다.

인호는 어릴 적에 호루라기를 무척 좋아했다.
호루라기 중에서도 선생님이 체육시간에 불던 우윳빛 호루라기보다는 군대에서 사용한다는
진녹색의 호루라기가 더 좋았다.
우유색 호루라기와 진녹색의 호루라기가 모양과 소리가 틀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인호는 흰색보다 녹색을 좋아했다.
그래서 하얀 스케치북 위에 그림을 그릴 때마다 인호는 녹색 나무와 초원을 즐겨 그렸다.
진녹색의 호루라기를 처음 본 것은 이웃집 동식이 때문 이였다.
동식은 어느 날부터 호루라기를 보석처럼 아끼며 동네 아이들에게 자랑을 하고 다녔다.
어디서 났느냐고 궁금해하는 아이들에게 동식은 삼촌이 가져다 준 것이라며 만지지도 못하게
하였다.
동식이 삼촌은 직업 군인 이였다.
그래서 동식 삼촌이 휴가를 나올 때 동식에게 호루라기를 선물하였다.
동식은 날만 새면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골목을 뛰어 다녔고 아이들은 호루라기를 한번 불어
보고 싶어 동식의 뒤를 따라 다녔다.
동식은 그때마다 자기가 맘에 드는 아이에게 한번 불어 보라며 호루라기를 잠시 건넸고
대장이나 된 듯이 선두에 서서 의기양양하였다.
동식이 호루라기에 싫증이 나고 딱지치기에 관심을 가질 즈음에 인호는 아끼던 왕딱지 백장을
모아 동식에게 주고 그렇게 갖고 싶어했던 진녹색의 호루라기를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호루라기를 동식에게 건네 받던 날, 인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입이 근질거려 참다 못한 인호는 가족이 모두 잠든 사이에 마당에 나가 힘차게 호루라기를
불었다.
호루라기 소리에 인호는 어두운 밤이 무섭지가 않았다.
호루라기 소리는 인호가 가지고 있던 모든 두려움을 밤하늘에 날려 버렸다.
갑작스런 호루라기 소리에 놀란 가족들은 마루로 뛰어 나왔고 인호는 아버지께 호된 꾸중을
들었다.

"야, 이놈아! 잠 안자고 뭐하는거여? 밤에 호루라기 불면 귀신들이 몰려오는 것이여!"

그 후 인호는 아버지가 무서워 밤에 호루라기를 불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말은 믿지를 않았다.
호루라기를 불면 오던 귀신도 소리에 놀라 달아날 것 같았다.
인호는 대낮에 아이들과 놀면서도 호루라기는 입에 물고 다녔다.
골목길이나 들녘을 지날 때도 늘 선두에 서서 호루라기를 불면 신이 저절로 났고 아이들은
어김없이 인호의 뒤를 따랐다.
밤에는 호루라기를 입에 물지 못하고 손에 꼭 쥐고 잠이 들었다.
몇 개월 동안 모았던 왕딱지 백장의 소중함 보다 한 개의 호루라기가 더 소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에서 미역을 감다가 호루라기를 그만 흐르는 물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헛 트림이 나도록 물을 마시며 물 속을 더듬고 헤맸지만 호루라기는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호루라기를 잃고 맥없이 집에 돌아온 인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해가 질 때까지 울었다.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호루라기가 사라지자 두려움은 인호의 마음속에 다시 둥지를 틀었다.

새벽 안개를 가르는 호루라기 소리가 끊기자 인호는 마음속에 간직했던 호루라기를 잃어버린
허탈감에서 한 동안 헤어나질 못했다.
인호의 호루라기를 빼앗아 가버린 여인의 발자국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