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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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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BY dlsdus60 2001-06-14

혜자는 가끔 집 앞 골목을 지키고 있다가 지나치는 학생의 가방을 빼앗아 집으로 도망쳐
오곤 했다.
혜자에게 가방을 빼앗긴 학생은 가진 돈을 주고 가방을 되찾아 가거나 혜자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혜자가 손님이 없어 궁여지책으로 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사내도 용서를 해
주었고 가방을 빼앗긴 학생들도 장난처럼 생각하며 그냥 넘기기도 했었다.
가방을 빼앗긴 학생들은 오죽하면 학생의 가방까지 빼앗을까 하는 동정심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혜자는 날이 갈수록 나이 많은 손님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젊은 사람들만 선호했다.
그래서 가방을 맨 대학생들이 혜자의 타겟이 되었고 때로는 화대도 받지 않은 채 손님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등록금이 들어있던 한 학생의 가방을 낚아채게 되었고 가방을 빼앗긴 학생은
혜자를 소매치기로 오인하여 경찰서에 신고를 하게 되었다.
경찰은 학생의 신고를 받고 전경까지 동원하여 혜자가 머무는 집을 덮쳤고 가방을 가지고
있던 혜자를 검거하였다.
그 일로 혜자는 꼼짝없이 경찰서에 끌려가 영창을 살뻔 하였는데 사내와 잘 알고 지내는
형사 덕분에 없었던 일로 마무리되었고 혜자는 사내에게 다시는 학생들의 가방을 빼앗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썼다.
혜자는 각서를 쓰면서도 자신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묻고 다그치는 사내에게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혜자는 그 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일상에 충실하였다.

사내는 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혜자의 방에 있던 가방을 가져다 인호에게 건네었다.

"너, 경찰서 가서 까발리면 죽은 줄 알어! 알았어?"
"넷!"
"그리고 돈 없으면 이 골목에 얼씬도 하지말어, 새끼들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여!
한 두 번도 아니고... 정신차려 임마!"
"넷, 알겠습니다!"

누그러진 사내의 말투에 인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가방을 찾아 준 사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어둠침침한 골목길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큰길로 나오는 동안 인호는 혜자가 마음속에 담고 있는 말
못할 사연이 무엇일까 내내 궁금했으며 한편으로는 불쌍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날 이후 인호는 사창가 골목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며 어쩌다 매춘을 하는 여자들과 볼 때면
먼 거리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인호는 그렇게 치를 떨었던 매춘 여인과의 상면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날은 인호가 군에 입대하여 6개월만에 첫휴가를 나오는 길이었다.
인호는 부대를 나오면서 가족과 친구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한껏 가슴이 부풀어올랐고
상병 고참이 칼같이 다림질해 준 군복이 구겨질까 봐 노심초사하며 고향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달리는 차창에 번지는 바깥 풍경들은 너무나 정겨웠고 인호는 억압에서 해방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남 몰래 눈물까지 흘렸다.
부모님을 비롯한 형제들의 얼굴과 친구들의 웃는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갈 때마다 인호는 얼싸
안고 싶어 주먹을 굳게 쥐었다.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았을 캠퍼스도 그리웠고 고향 마을에 자갈이 굴러다니는 황토 길도
걷고 싶었다.
주말이면 고향집에 내려 갈 때마다 인호를 반기던 누렁이도 안고 싶었고 장독대 위에서 붉게
피어난 해당화도 보고 싶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열차는 고대하던 고향 역에 잠시 멈추었다.
마중 나온 균호가 플랫포옴까지 나와 열차에서 내리는 인호를 반겼다.
둘은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았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뜨겁게 얼싸 안고 악수도 나누었다.
균호는 인호와 어릴 적부터 단짝 친구였다.
둘은 초등학교 때부터 작은 키도 비슷해서 줄을 서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리다툼을 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균호의 키는 자라지 않았고 인호의 키는 그 동안 자라지
않았던 것까지 한꺼번에 커버렸다.
균호는 자신보다 훌쩍 커버린 인호를 올려다보며 늘 부러워했으며 그때마다 인호는 나만큼
자랄 때가 있을 거라며 키크는 것에 자신이 없어 하던 균호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균호는 세월이 흘러도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고 인호와 함께 있으면 균호의 머리
끝은 인호의 귀를 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