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 옆에는 붉은색이 바랜 초라한 우편함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매달려 있었다.
그곳에는 반쯤 혀를 내밀고 있는 듯한 각종 고지서, 빗물에 젖어 말라붙은 색 바랜 편지들이
주인을 잃은 듯이 어지럽게 꽂혀 있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배달된 우편물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인호는 자신과 또 다른 생명체가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배달된 우편물에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았고 평범한 일상을
거부하며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이질적인 삶을 살아가는 듯 보였다.
이들은 어쩌면 인간의 삶의 터전을 매개로 인간에게 기생하고 있는 또 다른 개체로서 인간의
본질을 이미 상실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호는 대문을 들어서면서 인간과 흡사한 개체가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했다.
서너 발자국을 뛴 인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마당과 집안을 둘러보았다.
가방을 빼앗아 간 여인은 보이지 않고 마당에는 검은 전선줄로 안채와 문간채 처마로 연결된
빨랫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는 많은 빨래들이 어지럽게 걸려 흔들리고 있었고 빨래 중에서도 여자들의 속옷이
대부분이었으며 색상도 다양했다.
검은색, 빨간색, 분홍색 그리고 하얀색 등 가느다란 빨랫줄이 옷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금새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흡사, 균형을 잃고 쓰러질 것 같은 모빌작품을 전시해 놓은 것 같았다.
마당 한쪽에는 어둠을 뒤집어 쓴 수도꼭지가 바람이 일 때마다 반짝이고 있었고 방치된
옷가지들이 고무 대야에서 흐물흐물 기어 나오고 있었다.
여인숙처럼 개조된 방 앞에는 한사람이 앉을만한 폭으로 마루가 연결되어 있었고 닫혀진
문에는 희미한 전등불빛이 물들어 있었다.
한줄기 찬바람은 죽음처럼 고요한 마당을 서성거렸다.
어느 방에서 흘러나오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여자의 앙칼진 욕지거리와
신음소리가 음산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인호는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면서 대문 밖으로 나가고 싶었으나 가방을 빼앗아 간
여인을 만나야 된다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었다.
초조함과 두려움이 더해 가는 마음을 졸이며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안채 끝 방에서 낯선 사내가 마루에 걸터앉아 구두를
신으며 인호를 쳐다보았다.
"거기 누구요?"
"네?"
"애들아! 손님 왔나 보다. 이놈의 가시나들이 뭐 하는 거여?"
사내는 인호의 대답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닫혀진 방문을 향해 소리를 질렀고 녹슨 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사내의 목소리에 놀래 인호는 몸을 움츠렸다.
"아저씨! 저 손님 아니에요. 누나한테 가방 찾으러 왔어요."
"뭐라고, 가방? 누나는 또 무슨 소리여, 너 학생이야?"
"넷! 대학생입니다."
인호 곁에 바짝 다가온 사내는 성난 사자의 눈빛으로 인호의 위아래를 유심히 살폈다.
인호는 순간적으로 온 몸이 얼어붙는 듯 부동자세를 취했고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고 싶었다.
사내는 마루에 걸터앉아 구두를 신던 모습과 달리 훤칠한 키에 짧게 자른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있었고 넓은 윤곽의 얼굴에 인호는 압도되었다.
사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쳐다볼 때마다 인호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인호는 자신도 모르게 대학 1학년, 병영훈련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학생들은 짧게 자른 머리로 몸에 잘 맞지도 않는 허름한 군복을 입고 살벌한 조교 앞에 도열해 있었다.
조교는 새까맣게 탄 피부와 무표정한 얼굴을 가리려는 듯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그는 몸에 상처가 나도 한 방울의 피와 눈물도 흘리지 않을 것 같았고 오로지 연약한 학생들을 군인으로 훈련시킬 목적으로 특수 제작된 인조인간처럼 보였다.
학생들은 그 앞에 서면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경직된 자세를 취했고 그의 호루라기 소리와
구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끝없이 반복되는 군사훈련에 몸이 약한 학생들은 지쳐 쓰러졌고 그때마다 조교는
달려들어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군화발로 밟고 걷어찼다.
인호는 동료 학생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한층 고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