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호는 혜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냘픈 몸매에 걸맞게 혜선은 하얀 피부에 갸름한 얼굴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단정하게 빗어 내린 까만 단발머리는 청순한 십대 소녀의 모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가끔씩 인호를 향해 고개를 돌릴 때마다 혜선의 눈동자는 이슬이
젖어 있는 듯 빛이 났다.
약간의 홍조를 띤 두 볼 밑에 버들잎처럼 가지런히 포개진 입술에서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오똑하게 선 콧날은 얼굴에 맞게 적당한 크기로 성형을 해 놓은 것처럼
돋보였다.
인호는 혜선이의 코 생김새를 보아 안경을 써도 참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선씨는 시력이 몇이에요?"
"시력요, 갑자기 그건 왜요?"
"아! 혜선씨가 안경을 쓰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요! 그럼 안경을 쓰고 나올걸 그랬나? 호호! 사실 눈은 별로 좋지 않아요. 그래서
일할 때나 책을 볼 때면 안경을 쓰지만 평소에는 렌즈를 끼고 다녀요."
"그럼, 오늘도 렌즈를 끼신 거예요?"
"네. 안경을 쓰면 좀 답답하데요. 그래서 좀 번거러워도 렌즈를 착용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혜선씨는 안경을 쓰나 렌즈를 끼나 다 어울려요."
"호호! 그래요. 기분은 좋네요. 둘 다 어울린다니! 저 놀리는 건 아니지요?"
"아이쿠! 어떻게 아셨어요? 하하!"
"왜 웃어요? 그럼, 저 지금 놀린 거예요?"
"아니요. 농담한 건데 하하! 춥지요? 배도 고픈데 우리 저녁 먹으로 갈래요?"
매연을 뒤집어 쓴 길가의 은행잎들은 스쳐 가는 찬바람에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스웨터를 여미는 혜선은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바람이 싫은 듯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혜선은 지난번 처음 만났을 때와 크게 달라진 옷차림은 아니었다.
군청색 스커트와 미색 블라우스는 지난번 입었던 옷과 색상만 약간 다를 뿐 디자인은
비슷하였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베이지색 스웨터를 블라우스 위에 걸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혜선의 깔끔한 옷차림은 화려함을 싫어하는 인호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인호는 무엇보다는 여자들이 화려한 색상으로 디자인 된 옷을 입고 다니는 걸 싫어했다.
단아한 옷차림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님을 보며 자란 이유도 있겠지만 화장을 진하게
하거나 강렬한 원색 칼라로 자신들의 본 모습을 포장해 버린 여자들을 볼 때마다 인호는
몹시 경계하고 싫어했다.
그것은 인호가 대학 다닐 때 당했던 기억이 되살아 났기 때문 이였다.
그날도 인호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오후 강의를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도심을 여기저기
쏘다니다 저녁이 되자 집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인호는 책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고 있었는데 그만 사창가가 밀집된
골목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집으로 가는 지름길을 간다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사창가 골목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골목은 미로처럼 길이 나 있었고 골목 입구마다 몸을 파는 여인들이
날이 어두워지기가 무섭게 짙은 화장과 화려한 옷을 입고 나와 골목길을 오가는 남정네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인호는 자신이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에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는데 골목 입구에
서있던 여인이 갑자기 인호에게 달려오더니 어깨에 맨 가방을 빼앗아 골목 안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인호는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너무나 놀라 한 동안 멍하니 서서 도망치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그 여인이 사라지는 골목 안으로 뛰어갔다.
어두워진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여인의 자취는 사라지고 없었고 소란스러운 여인들의
목소리가 골목에 거미줄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인호는 가방을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에 골목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는데 어디에 있다 다시
나타났는지 가방을 든 여인은 인호 앞에 있는 대문에 몸을 기대고 서서 깔깔대고 웃으며
소리를 질렀다.
"학생! 가방 여기 있어요!"
"지금 뭐하는 거예요?"
"학생, 나랑 놀고 싶지 않아요? 싸게 해 줄게. 들어와라!"
인호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손님이 없어도 그렇지 길가는 학생의 가방까지 빼앗고 그것을 볼모로 삼아 자신을
유혹하는 여인의 괘씸함에 인호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인호는 어두워진 골목을 두리번거리다 깨어져 있던 보도 블록 조각을 손에 들었다.
"아가씨! 가방 안 돌려주면 가만 두지 않을 거예요?"
"자식, 웃기고 있네. 던질 테면 던져 봐, 병신아!"
여인의 예상치 못한 앙칼진 목소리에 인호는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손에 쥐었던 블록
조각을 살며시 놓아 버렸다.
"아가씨, 가방 주세요! 나 돈 없단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