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인호는 동료 직원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도 마다 않고 하면서도 귀찮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가족과 신상에 관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아
직원들은 고아로 자란 사람으로 착각을 할 정도였다.
이러한 인호의 언행은 자신의 자존심과 깊이 관계되어 있었다.
인호는 디자인 회사에 취직을 한 후 적잖은 실망과 함께 교사 생활과는 달리 자신이 밑바닥
인생을 걷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사를 하던 사람이 존경스럽지도 않은 상사의 지시를 받고 꾸중을 듣는 것이나
선배라고 허풍떠는 직원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내심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였다.
그래서 아직 디자이너로서 정당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과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동료 직원들에게 조롱거리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으며 훗날
교사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디자이너가 되어 당당하게 대접을 받았을 때 비로소
친구들과 연락을 재개하고 직원들과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자신의 언행을 지배하고 있는 자존심 덕분에 인호는 일년이 넘도록 책과 일에 몰두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회사에서도 디자이너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때서야 인호는 직원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열게 되었고 일을 할 때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의진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 밖에 모르는 인호가 안쓰러웠고 마침 인호와 어울릴 만한
친구가 있어 소개를 해 주고 싶었으나 인호는 정작 여자에게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아 지켜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토요일 오후, 직원 모두가 퇴근을 서두르는데 인호는 퇴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늦은
약속이나 있는 듯 기지개를 펴며 뜻하지 않은 말을 하였다.
"아!~ 나도 여자 친구하나 있으면 좋겠다. 임의진씨! 참하게 생긴 친구하나 없어요?"
"있어요. 소개해 드려요?"
"나야 좋지요. 의진씨와 친하면 더욱 좋구요."
처음에 의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농담처럼 건네는 인호의 말에는 진한 외로움이
배어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인호씨는 이제까지 여자 친구하나 없이 뭐하고 살았어요?"
"그냥 막 살았지요. 아무 생각 없이……."
"알았어요. 그럼 내가 인호씨와 어울릴만한 친구 한사람 소개 해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의진씨! 농담인줄 아시죠? 주말 잘 보내세요."
"아니요. 진담으로 받아 드리겠습니다."
의진은 퇴근을 하면서 점 찍어둔 친구 혜선이를 떠올렸다.
혜선이는 나이도 인호보다 한살 어렸고 조용한 성격과 외모도 인호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