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일까?
결제서류를 대충 처리한 후, 가방을 둘러매면서 그녀는 잠시 창 밖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윤사장님! 내가 의논할 일이 있는데 시간 좀 내주시겠소?"
판사출신의 신망받는 변호사로 법조계의 지도층으로 알려진 사람이지만, 남편의 대학선배인 인연으로 한두번 식사를 같이 한 정도이기 때문에 따로 만나야 할 용건이 있을리가 만무했다.
"아? 여기요."
호텔 커피??한 귀퉁이에서 그가 손을 번쩍 들었다.
검으튀튀한 피부에 주먹코! 울퉁불퉁한 얼굴이 잘 생긴 편은 아니지만, 성공한 남자들이 갖는 적당한 권위와 품위가 어우러져 보기싫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우리 사장님이 귀한 시간 내주셨는데, 맛있는 걸 대접해야 될텐데 어쩔려나?"
미리 예약한 듯, 일식당으로 안내하면서 그는 싱긋 웃었다.
"전, 식성이 좋아 아무거나 잘 먹어요."
"그래, 출판사는 잘 되시지요?"
"훗훗! 요즘 인쇄매체는 사양산업이잖아요? 그래도 씩씩하게 잘 버티고 있어요."
식사를 거의 끝나가는데도 그는 좀체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술 한 잔 더 합시다."
"그런데 선배님 무슨 일이신가요?"
"응? 특별한 일은 없고.. 일전에 윤사장님이 쓴 칼럼 보고 나 감동받았어요. 그래서 얼굴도 보고 같이 얘기도 나누고 싶고..겸사겸사 모셨지요."
대학시절, 그녀는 비비안 리로 통했다.
문재를 겸비한 학보사 기자로 후리후리한 키에 윤곽이 뚜렷한 서구형 미인이었다.
당연히 그녀를 두고 여러 남자들이 가슴앓이를 하였지만 그녀의 눈에 웬간한 남자는 찰 리가 없었다.
"최박사는 좋겠어. 이런 미인인 문필가를 마나님으로 모셨으니..."
"예? 오십이 넘은 할망구를 이쁘게 봐주시니 황송하네요."
"무슨 소리? 아직도 너무 곱구만.. 두 분은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부러운 커풀이예요."
적당히 취기가 오른 그의 눈빛에 언뜻 외로움이 스쳤다.
"나는 연애 한번 못해보고 우리 마누라와 결혼했어요."
"그때는 흔히 그랬지요?"
"그렇게 얼떨결에 결혼하고, 아이들 생기고, 일에 파묻혀 살다보니 오십이 어느새 훌쩍 넘었겠지요?"
어려서부터 신동소리를 듣고 자란 그는 지독히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그는 장학금으로 고교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대학도 명문대 법학과를 수월하게 합격할 수 있었다.
먹고 자는 것 빼고는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린 끝에 고시에 합격하고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로 들어섰다.
당연히 딸 가진 부모들의 주요 헌팅대상이 되었고, 맘에는 안들었지만 제법 행세하고 사는 고위공무원의 딸과 맺어지게 된 것이다.
어느새 빈 술병이 세개로 늘었고 그의 얘기는 끝이 날 줄 몰랐다.
"시간이 꽤 됐네요. 이제 일어서죠."
"내, 윤사장님께 부탁드릴 말이 있어요."
"뭔데요?"
"후배한테는 나 만났다는 말 절대 하지 말았으면 좋겠고.. 가끔, 아주 가끔 이렇게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소?"
"아니 왜요? 남편도 선배님 만났다하면 반가와 할텐데.. 우리 같이 만나요."
"아니야! 아니야! 그러면 안돼요. 후배가 기분 상해 할꺼야.."
그렇게 헤어진 며칠 후!
그에게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난감해진 그녀는 이 핑계, 저 핑계로 둘러대다 할 수 없이 다음 날 있을 토론회 끝난 후 찻집에서 잠시 보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작이 있었는지.. 불그레한 얼굴로 그가 환하게 웃었다.
"나, 일찍와서 윤사장 발제하는 모습 지켜봤어요. 참 잘합디다."
"히히! 그랬어요? 우리 남편은 뭐하는 거야? 와서 마누라 잘한다 격려도 안해주고..."
"그 친구가 정신없이 바쁜가 봅디다. 부인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하던데?"
"이제, 늙어서 그런지.. 자꾸 일이 몰리는 게 힘들어요."
그래도, 윤사장 재능 썩히기 아까워요. 일하는 여성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게 비치는지 알아요?"
그 때! 그녀의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어디 있어? 내가 그리고 갈테니까 집에 같이 들어가자."
갑자기 그는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했다.
" 윤사장! 나와 함께 있다는 말 하지 말아요!"
그는 손까지 내저었다.
" ......... "
"미안해요. 윤사장! 나 먼저 일어서겠소. 또 볼 기회가 있겠지요?"
"그러실래요? 그럼 안녕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찻집 한 켠 어둠 속에서 그는 우두커니 서있었다.
남편의 차에 올라타며 따뜻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탄 차의 불빛이 그를 ?고 지나갔다.
오랫동안...
한쪽 팔이 젖는 줄도 모르고 그는 그렇게 서있었다.
빗속에 사라진 그녀의 뒷모습을 눈에 담고서...
꽃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