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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필요 없었다.
그동안 참아왔던 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말을 하기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그저 몸과 마음이 하는대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제 더 이상 자제심을 발휘하기엔 무리였다.
시현도 같은 마음으로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하나하나 그녀에게 깨우치고 있었다.
[ ... 왜 이렇게 힘들었던거지?... 결국 이렇게 될 걸 알았으면서도. 다 눈치없는 당신때문이야 ]
그의 벗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금전의 황홀한 순간들을 음미하면서 그녀는 미소 지었다.
[ ... 그때 ... 진짜 아무 일 없었어...당신이랑 싸우고 나서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와서 엄청 마셨는데 ...누구지?... 이름도 기억안나 걔가 옆에서 자는것도 몰랐어 ]
[ 알아 ]
[ 안다구? ... 그럼 왜 떠난거야? ]
그가 화난 목소리로 벌떡 일어서자 그녀의 머리가 침대위로 떨어졌다.
[ 나중에 얘기하면 안돼?...졸려 ]
와인탓인지 자꾸 눈꺼풀이 내려갔다
[ ...이제 다시 시작하는거지? ]
[ 글쎄... ]
더 이상 참기 힘들어 그녀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그는 옆에 없었다.
몸과 마음이 너무 개운했다.
기지개를 쭉 피고 있는데 그가 들어와 흘러내리는 이불을 여미며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같은 반응을 기대 했는데 차갑게 굳은 얼굴을 보고 그녀는 당황해서 침대 위에 앉아 그를 바라 보았다.
[ 왜그래? ]
그가 불쑥 뭔가를 그녀 앞에 던지자 그것이 정운에게 받은 반지라는걸 알았다.
[ 내 백을 뒤졌어? ] 흥분하지 않기 위해 정운의 반지를 꼭 쥐며 말했다.
[ 핸드폰이 울려 대길래... 뭐지? 나한테 주려고 가지고 있던건 아닌 것 같은데 ... 그래서 어젯밤에 대답을 안한거야? ]
세상에, 그땐 그저 그를 놀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 대단하군 ... 뭐야? 다른 남자에게 가기전에 전남편이 어땠나 한번 비교라도 할 작정이었어? ]
[ 미쳤어, 나한테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지? ]
[ 그래 미쳤어... 너한테 미쳐서 이러는 내가 한심스러워... 나가줘 다신 보고 싶지 않아 ]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알몸인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그의 앞에서 옷을 걸쳐 입고는 밖으로 나왔다.
마주 앉은 정운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면서 반지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 미안해요. 진작 돌려 드렸어야 했는데 ]
[ ...무슨 일 있는거야? 얼굴이 너무 안좋아 보여 ]
[ 저... 이제 일하고 싶지 않아요 ... 죄송해요 ]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 잠깐... 너무 힘들면 잠시 쉬어도 돼.... 내가 너무 부담을 준거야? ]
그의 너무 미안해하는 표정을 보며 죄책감을 느꼈다.
[ 아니예요... 그냥 더 이상 도움이 못 될거예요. 아무일도 할수 없을 것 같아서 ]
[ 묻고 싶은건 너무 많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될 것 같군... 일단 받아 두지만 당신이 언제고 돌아오고 싶을 땐 와도 된다는거 잊지마 ]
그의 마지막 배려에 가슴이 너무 아프도록 고마웠다.
[ ... 고마워요... ]
우린 언제나 늘 어긋나기만 했지. 시작을 기대하기엔 옛일을 너무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지 모른다.
또 한번 되풀이될 악몽을 미리 막아줘서 고마워 해야하나.
대전에 다녀왔다.
언니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빈 점포가 있어 집이 나가는대로 보증금을 빼서 그리 내려갈 작정이었다.
한낮의 태양이 너무 뜨거워 부동산에 집을 내 놓으러 갔다가 아스팔트위의 열기로 질식해 죽는줄 알았다
빨리 장마라도 시작됐으면, 하긴 장마가 끝나면 더 더워 질테지만...
차가운 아이스티라도 만들어 마시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택배회사 직원이 커다란 박스를 내려놓으며 사인을 받아갔다.
그녀가 박스 테이프를 떼어낼 칼을 찾다 궁금함을 못이기고 손으로 테잎끝부터 ?센爭뼈?상자까지 같이 찢어져 버렸다.
상자를 열자 맨처음 비디오 테잎이 눈에 띄었고 그 밑으로 액자와 앨범이 들어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비디오 테잎을 꺼내놓고 액자를 들어 올리자 그녀가 처음보는 사진이 들어있었다.
그녀가 있을 때 찾아오지 못했던 그들의 결혼사진.
액자를 내려놓고 앨범을 열자 야외촬영을 했던 사진들과 친구들과의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
눈물 한방울이 앨범위로 떨어졌다.
사진속의 시현은 너무 황홀한 모습이었다.
얼마전 그의 친구에게서 보았던 사랑에 빠져 행복에 넘쳐 있는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땐 어리석고 이기적이었던 자신이 볼수 없었던 모습을 이제야 느낄수 있었다.
망설일것도 없이 일어나서 열쇠를 찾아 나가려는데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