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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
[ 정말 시현 씨도 못 말릴 사람이네요... 꼭 이렇게 까지 해야 되는 거예요? ]
귓가에서 맴도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생각해내려 애쓰며 그녀는 자신이 엎드려 있었다는걸 깨달았다.
퍼뜩 고개를 들자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을 보려했지만 너무 높아 제대로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 저 사람이 저렇게 컸던가, 아님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
그가 자리에 앉자 그녀는 이제 그의 눈을 자세히 보려고 몽롱해진 눈을 깜박였다.
[ 어∼ 누구시더라... 아! 맞다. 내 ...남편이지...전.남.편. ]
그녀가 최대한 또박또박 얘기하자 그가 잠시 동요하는 듯했다.
[ 아깐 그렇게 의연하게 대하더니 그 기백은 어디 간 거야? 여기 와서 이렇게 무너지다니 ]
[ 당신같은사람 ...정말 싫어. 왜, 내인생에 자꾸 끼어드는거야? ...나...너무 바보같아 ]
[ 여기 있을 줄 알고 왔지만 지금은 얘기가 안될 것 같다. 내일 보는게 낫겠어...이것만은 알아줘, 널 괴롭히기 위해 나타난건 아니란걸 ]
[ 여전히 말은 잘하시는군...이미 이렇게 날 곤경에 빠트려놓고 항상 죄는 다른사람에게 떠넘기지...나, 당신 당할 자신 없어 그러니 제발 ... 내 앞에서 사라져 ]
[ 그건... 아직 나에게 감정이 남아 있다는걸로 해석해도 될까? ]
[ 후∼ 글쎄 맘대로 생각하시죠... 당신은 무시당하는 것 보단 어떤 감정이든 있는걸 바랄테니까, 증오든...사랑이든 ]
그의 입술끝이 살짝 치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화를 참고 있는 듯이.
[ 내일 보자 ]
그가 일어서 나가는 뒷모습을 쳐다보다 그녀는 다시 탁자위로 쓰러졌다.
아침에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이 혜원의 방 침대에 누워있는걸 알곤 일어나려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속이 울렁거려 다시 누웠다.
어제 일을 곰곰히 되짚어보려는데 혜원이 쟁반을 들고 들어와 그녀에게 물잔을 내밀었다.
[ 괜찮니? ]
[ 나 데려오느라 힘들었겠다...하나도 기억이 안나 ]
[ 진이야 ...어쩜 그렇게 심각한 일이 아닐지도 몰라, 시현씨 우리가게 왔을 때 진짜 인테리어에 굉장히 관심을 보였고 맘에 들어했었어. 너한테 일부러 괴롭히기 위해 그런 일을 할 사람이라고 까진 생각하고 싶지 않다.]
[ ...나도 모르겠어. 내가 어떡해야 하는건지, 사장님한테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없어. 그동안 날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데 ]
[ 그럼 눈 딱 감고 일해버려. 그리곤 깨끗이 끝내는거야... 근데 정운씬 널 언제까지 바라보고만 있을 거래? ]
[ 그런거 없어 ...우린 절대 그런 사이 아냐. 내가 그저 많이 도움을 받았지만 그런 생각까지 한다면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야 ]
그녀가 정색을 하자 혜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 그럴까...어쨌든 너, 지금 출근 늦은거 알지? 회사엔 내가 전화했어, 니가 좀 아프다구,
전화해달라더라 ]
혜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시계를 확인하곤 깜짝 놀라 침대에서 뛰어 나왔다.
[ 많이 아픈거야? 놀랬잖아, 한번도 그런 일이 없어서...아, 회사에 나올 것 없이 김 시현씨가 자기 건물을 봐 주길 바래. 그쪽으로 바로 가보는게 좋겠어.]
정운이 불러주는 위치를 받아 적으며 그녀는 이제 자신의 일이 결정 난 듯 싶었다.
그래, 일단 해보는거지 뭐.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나약하게 자신의 감정이 무너지는 걸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한결 기운이 나는 듯 했다.
다이어리를 접고 그녀는 샤워를 한후 얼굴이 약간 부은 듯 했지만 혜원의 화장품으로 평소보다 짙게 화장한 후 집을 나왔다.
시현이 말한 건물은 생각보다 컸지만 외관이 그의 말대로 많이 낡아 있었다.
그의 건물 앞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이층으로 난 계단에서 내려오는 시현과 눈이 마주쳤다
[ 건물이 비어 있네요? ]
일층에 제과점이었을 것 같은 공간이 비어 있자 그녀가 물었다.
[ 세입자들이 많지 않아서 별로 힘들이지 않고 건물을 비울수가 있었어, 고치는 동안 다른곳에 자리잡을 시간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굳이 재계약 하려 들지 않더라구... 이제 마음이 결정난거야 ]
[ 별로... 아직은 다른 선택이 생각나지 않네요? 어떤 용도로 쓸거예요? ]
[ 어디가서 해장국이라도 먹는게 어떨까? 아침을 먹었을 것 같지 않은데 ]
[ 됐어요. 빨리 얘기 끝내고 회사로 들어가 봐야되요 ]
그녀의 대답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그녀의 팔꿈치를 붙잡고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와 마주한 자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해장국을 들여다 보며 그녀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왜 이사람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지 못할까.
[ 먹으면서 얘기 하자구... 건물은 지하 일층 포함해서 4층이야. 일층은 아까 봤을 테지만
제과점이었었고 나머지 2,3층은 사무실이었었구... 나는 지하를 내 작업실로 만들었으면 좋겠어. 일층은 친구놈이 자기 스튜디오를 만들겠다고 해서 세를 주기로 했고 3층은 내가 쉴 공간이 되길 바래. ]
[ 2층은요? ]
[ 그건 아직... 곧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타나겠지 ]
[ 건물 하나가 아주 개인적인 용도로 쓰이는 거네요, 좋겠어요? ]
[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군... 해주겠지? ]
[ 글쎄요, 일단 견적을 뽑아봐야 겠죠, 외관도 바꿀 생각이니까 비용이 꽤 들거예요. 그럼 당신 생각이 달라질수도 있으니까 ]
그녀의 야무진 대답에 그가 미소지었다.
[ 좋아, 될 수 있으면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어. 빨리 내 기계를 작업실로 옮겨 놓고 싶으니까 ]
그의 즐거워하는 얼굴을 보며 그녀는 알수 없는 감정이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식사를 마쳤는지 모르게 시간이 지났고 커피를 마시자는 그의 제안을 거부하고 그녀는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