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의 일이 있은 날, 우리 함께 이곳에 온 후로 이곳은 처음이지?"
춘천의 강변에 있는 별장에서 오후의 따듯한 볕을 즐기며 남자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파라솔 밑의 의자에서 일어나 강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여자의 뒤를 따라 남자도 함께 걷
기 시작했다.
"그 날, 그 여자의 눈. 정말 잊을 수가 없어. . ."
"공연한 애길 꺼냈나 보군."
"아니, 그 여잘 무섭게 증오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던 것 같아. 나에게
버려지고, 재생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하게 사회적으로 매장 당해 지금은 부랑자가 되다시피
한 내 남편.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여자. 복수의 일념으로 무섭게 날뛰던 나 자신.그리
고 날 사랑한 대가로 살인까지 한 당신. 어느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버지일 한 사람의 죽음.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 아픈 건 이렇게 일이 진행되는 동안 버려지다시피 한 내 자식들이 겪
었을 고통들. 배신의 상처를 갚기 위해 저지른 내 행동들이 지금 생각하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여자는 고개를 떨군 채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들의 죄를 응징하지 않고는 다친 내 자존심이 회복될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냥 그들을 그
대로 내 버려 둔다는 건 내 자신 너무 무능하고 바보라는 걸 세상에 알리는 것 같아 몹시
심한 모멸감과 굴욕감이 느껴졌었지. 그래서 응징을 하는 것만이 내 자신의 명예를 되찿고
나 자신에게 스스로 떳떳한 길이라 생각했는데. . . 지금 생각하니 내가 너무 별 볼일 없는
인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 . . . . 지나간 일들을 후회하며 흔들리고 있는 여자를 보며 남
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계속 여자의 애기를 듣고 있었다.
자기, 이말 알아? 죄는 아무나 질 수 있지만 용서는 아무나 할 수 없다는 말. . .
난 결국 그들과 똑같은 죄를 짓고 말았어. 그들보다 한치도 낳을 것이 없는 그런 쓰레기 같
은 인간이 되고 말았단 말이야. 용서로 그들을 덮고 남편을 이해했다면 아이들도 덜 상처
받았을테고 당신도 날 사랑했다는 이유로 이렇게 살인자가 되진 않았을텐데, 나 역시도 이
렇듯 추한 인간으로 남지 않아도 되었을 꺼구. . . "
남자가 가냘프게 흔들리는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젠 그만 생각해. 그리고 내 몫까지 힘들어 할 생각은 하지 말어 난 당신이 나를 떠난 후
에도 줄곧 당신을 사랑해 왔어. 유부녀가 된 당신을 마음속으로 간음하고 품고 살아 온 거
지. 당신과 당신의 남편이 모진 일들을 겪고 있을 때 난 당신을 차지할 기회만 노렸었거든.
결국 우희란 여자나 당신의 남편과 같은 급의 저질스러운 인간일 뿐이야. 지금도 내가 살인
을 했다는 죄책감보다는 당신이 나를 받아들이고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해서
내가 이렇듯 이기적인 인간이었나 스스로 생각하며 나 자신에게 놀라고 있거든. 그러니까,
나 같은 인간 때문에 당신 아파하지마. 난 내가 갈 길을 스스로 선택 한 것 뿐이야."
"날 위로하지마. 난 형편없는 여자라는 거 당신이 더 잘 알잖아."
"아니,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하건, 어떤 일을 했던 그저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
야."
"내가 추하다고 생각 해보지는 않았어?"
"아니, 당신이 너무도 극단적인 방법으로 남편과 그 여자에게 복수하는 모습을 보며 그 증
오속에서 그 사람을 증오하는 만큼 극도로 사랑했었을 당신의 마음을 생각하니 오히려 질투
가 나던걸, 그리고 넘치는 사랑을 받았을 그 남자가 부럽다는 생각도, 아파하는 모습이도
너무 애처로워서 나 무척 힘들었어. 그리고 좀 더 이성을 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던
건 사실이야, 허지만 당신을 추하다고 생각 한 적은 없어, 단 한번도. . . 내가 옆에서 당신
을 말리지 못한 건 당신의 분노가 너무나 커서 말리는 나까지 미워 할까봐 말하지 못했던
거야. 나, 참 나쁘지?. . ."
여자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아, 미안해. 미안해. 정말이지, 정말. . . 왜 좀더 침착하고 냉정하지 못하고 오로지 복수만
을 생각한 건지, 정말. 그 땐 왜 그랬는지. . ."
오열하는 여자를 진정시키며 남자는 여자의 말을 되 뇌이고 있었다.
"죄는 아무나 지을 수 있지만 용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그 말을. . . 그랬
다.
사람들이 아무리 사랑을 이야기하고 떠들어대도 진정으로 용서 할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상대를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
고, 상대를 배신 할 만큼 가벼운 사랑을 하는 사람과 상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배신하게
끔 만드는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모르는 탐욕에 빠진 속물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