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덕이 사라지는 모습을 다른 골목에서 훔쳐보던 한 남자가 어두움 속에서 시계를 쳐다보았다. 지금부터 정확히 두 시간이 지나면 저 방으로 들어갔던 남자를 배웅하러 우희는 다시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골목 어귀까지 가서 그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 것이고, 다시 집을 향해 골목으로 들어서면 그 때, 우희를 공격하면 될 일이었다. 남자는 다시 시계를 쳐다보고 길가에 세워둔 자신의 승용차 안으로 사라졌다.
진한 향수냄새가 풍기는 방안에서는 두 남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고 우희는 지금 몹시 달
아올라 있었지만 상대방 남자는 키스 외에 더 이상 진전된 상황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 고
지식한 남자는 결혼 전 순결을 지켜 주는 것이 우희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밀착되어 매달리며 숨가쁘게 자신의 입술을 탐닉하고 있는
우희가 지금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과감하리 만큼 자
신의 몸을 손으로 더듬으며 자신의 손을 우희 자신의 가슴에 끌어 당기는 그녀의 손길을 거
부해 내기에 이 밤은 너무도 자신에게 힘든 일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남자는 거칠게
우희의 손길을 거부했다.
"그만, 이러지 마."
남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충혈 된 눈으로 우희의 눈을 들여다보며 애원하듯 말했다. 아무
말 없이 토라진 듯한 표정으로 남자의 가슴에 기대 남자의 양쪽 겨드랑이 밑으로 자신의 손
을 꼭 끼운채 우희는 부끄럽다는 듯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 날, 이상한 여자로 생각했겠구나 자기?"
" 이상하긴. 날 사랑하니까 무조건 날 믿고 자기를 나에게 맡기려 한다는 걸 내가 잘 아는
데. . . 당신 맘이 그런 거라면 나 역시 당신을 결혼 전까지 곱게 지켜 주고 싶단 말이야. 내
맘 알지? "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우희를 끌어안으며 남자는 우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럼, 뽀뽀만. . ." 콧소리로 말하는 우희의 뺨을 꼬집으며 남자는 우희의 조그마한 입술을
자신의 혀로 부드럽게 핱고 깨물었다. 우희의 귓볼과 뺨과 눈과 혀를 쉴 사이 없이 부드럽
고 거칠게 애무하는 동안 우희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 설흔을 넘긴 젊은
남자와 여자가 호젓한 방안에서 한시간이 넘도록 키쓰만 하고 있다면 누가 믿어줄까? 정말
이 남자는 못 말리겠군. 이건 고지식한 정도가 아니라 바보 같았다. 이런 남자가 혹시라도
자신의 본색을 알게 된다면? 우희는 몸이 떨려왔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 . 어떤 누구 앞에서라도 자신의 행실을 추궁 당해도 당당할
수 있는 그녀였는데, 지금은 두려웠다. 그가 알게 될까봐 우희는 정말 두려웠다. 내가 어느
새 이 남자를 이토록 가슴 깊은 곳에 두고 있었다니. . . 남자의 품에서 빠져 나온 우희는
원두커피 두 잔을 컵에 따라 부었다. 한잔을 남자에게 내밀며 "너무 늦기 전에 집으로 가야
되죠?" 진정된 우희의 모습을 보며 남자는 커피를 받아 들었다. 한 손으로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남자의 두터운 손에는 땀이 배어있었고 충혈된 눈은 우희의 얼굴
위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 빨리 결혼하자"
"아직은 싫어요. 좀 더 있다가. . ."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하는거지? 나 당신 두고 이렇게 가는 거 정말 힘들단 말이야. 날 원
하면서 왜 결혼을 자꾸 뒤로 미루려는 거지?"
"기다려 주세요. 결혼 전에 마무리 지을 일들이 좀 있는데 시간이 필요해요."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내가 도와줄 일은 없어? "
"아무 것도 묻지 말고 그냥 기다려주세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면 제가 말할 께요."
남자는 잠시 우희를 안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헤어지기 아쉬운 듯 미적거리는 남자를 두고, 마침 달려오는 택시를 잡기 위해 우희가 손을
흔들었다. 차를 탄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우희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 서서
걷기 시작했다. 가로등 불빛이 오늘따라 어둡다고 느끼면서 골목길을 걷고 있던 우희는 뒤
쪽에서 누군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막 뒤돌아 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자신의 입과 코를 막는 것을 느꼈고, 독한 약품냄새에 우희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남자가 기절한 우희를 안으려고 허리를 구부리는데 술에 만취된 김상덕이 자신의 쪽으로 급
히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었다. 남자가 재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주택가 골목인지라 이 늦은 시간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고 불이 켜
져 있는 집도 보이지 않았다. 비척거리며 위험에 빠진 우희를 구하려는 듯 자신에게 달려드
는 김상덕을 남자는 재빠르게 피하고 순식간에 김상덕을 쓰러트렸다. 워낙 술에 취한 데다
가 남자의 주먹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김상덕은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이 때, 차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츄리닝 차림으로 차에서 내려, 우희와 김상덕을 차안으로
옮기는 것을 도왔다. 차문이 닫히고 급하게 차가 출발하자 차안에서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
로 남자에게 물었다. "이 남잔 도데체 뭐예요? 같이 있던 남자는 갔잖아요." "같이 있었던
남자가 아니야. 따로 사귀고 있던 남자지. 아까, 이 여자와 약혼자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가
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술이 취한채 그 자리를 떠났었는데 다시 돌아왔어. 아마 다시 확인하
러 왔거나, 싸우러 왔거나 하던 길이었겠지, 그나저나 아까보다 훨씬 많이 취했군.
"이 남자는 어디다 두고 가지? "
"두고 간다고요? 그럴 수는 없어요. 당신 얼굴을 봤을지도 모르는데. . ."
"술이 많이 취해서 아마 알아보지 못했을 거야."
"안돼요. 그냥 함께 없애기로 해요."
단호한 태도로 여자는 말을 마치고 마취제가 묻은 가제수건 다섯 장을 둘로 나눠 이미 기절
해 있는 두 사람의 코에 다시 덮었다. 차는 자유로를 지나 일산의 어느 야산에 도착했고 숲
속에 미리 준비해 둔 듯한 자동차 한 대가 번호판도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먼저 김
상덕을 차에서 끌어내린 후 등에 업고 차 쪽으로 다가섰다.
앞쪽 운전자석에 김상덕을 앉히기는 쉽지 않으련만 덩치 좋은 이 남자는 상덕을 쉽게 자리
에 앉히고 다시 자신들의 자동차로 가 우희를 가볍게 안아 올려 조수석에 앉혔다. 자신에
게 준비해온 정과 철사줄을 함께 내미는 여자를 흘낏 바라본 남자는 말없이 자동차 뒷 칸으
로 갔다. 먼저 상덕의 목에, 겹겹으로 되어 있는 철사줄을 동여맨 뒤 정으로 철사줄을 의자
뒤에서 틀어쥐며 꼬기 시작했다. 철사줄이 점점 단단하게 조여들고 이미 기절한 상덕의 숨
이 멎자 남자는 철사줄에 끼여있는 정을 뽑아들었다. 다시 우희의 뒤쪽으로 자리를 옮긴
남자가 똑 같은 방법으로 철사줄을 죄기 시작했을 때 우희가 움직였고, 옆에 있던 여자가
남자의 행동을 저지했다.
정신이 혼미한 듯 하면서도 자신이 위험에 빠진걸 알아차린 듯, 버둥거리며 숨쉬기가 곤란
해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는 우희 에게 여자가 나즈막한 소리로 말했다. "네가 장난 삼
아 한일이 너를 죽음으로 몰아 간 거야, 나를 원망하지마, 너로 인해 나로 하여금 고통 속에
서 울부짖게 한 대가를 이렇게 치루게 하는 건 너무 약소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렇게 끝
나게 되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될 꺼야. 만일 옆에 너 때문에 어이없게 함께 목숨을 잃
은 저 남자 때문에 쓸데없는 시간이 소모되지 않았다면 널 이렇게 간단하게 죽이진 않았을
테니까." 스러져 가는 우희가 그 여자를 알아보고 절망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
을 바라보던 여자가 남자에게 눈짓을 하자 남자는 쥐고 있던 정을 더욱 세차게 틀어쥐었고
우희는 공포와 고통이 가득 찬 모습으로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차 문을 닫고 다시 자신들의 차로 돌아 온 두 사람은 증거물들을 함께 싣고 자신들이 달려
왔던 방향과는 반대 방향인 춘천 쪽으로 가기 위해 차를 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