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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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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동안


BY hl1lth 2001-03-30


상덕은 지금 많이 취해 있었다. 도저히 취하지 않고는 이 상황에서 견뎌 낼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나란 놈은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일까?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그녀 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차라리 아내가 악처이거나 형편없는 여자라면 이렇게 힘들지 않을지도 몰랐다. 첫사랑, 나의 첫사랑 그녀가 내 곁에 있음을 얼마나 신께 감사하고 그녀를 통해 세상에 나온 자신의 두 아이들이 있음을 얼마나 행운이라 여겼었는지. . . 그러나 지금은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신의 배신으로 상처받은 그녀로부터 예전같은 믿음을 얻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눈을 다시는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차라리 그녀가 다른 이들처럼 자신의 배신에 분노하면서 자신의 곁을 떠나 주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상덕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순은 절대로 자신의 가정을 깨트려 아이들에게 상
처 주는 일을 할 여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배신에 영혼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을 느끼고 있
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아빠 없는 아이, 혹은 이혼한 가정의
자녀들이란 딱지를 달고 다니게 하지는 결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자
신이 그녀에게 행하는 모욕적이고 부당하게 대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으면서도 이제
는 더 이상 자신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보아주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우희의 흔적
을 남겨와도 화내는 일조차 없었다. 그것이 상덕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그녀를 더욱 더
증오하게 만들었다. 이미 자신은 그녀에게서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도망가고 싶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희라는 여자를 미치도록 사랑해서라기 보다,
미순 옆에 늘 초라하게 느껴지는 자신이 너무도 싫어서 그녀 옆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옹졸
한 놈. 스스로를 비웃으며 손에 쥔 소주병을 입속으로 털어 넣으며 상덕은 자신을 욕했다.
그녀의 사랑과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배신으로 마무리 해버린 자기 자신을 용서 할 수 없음에
괴로워하면서도, 상덕은 그녀에게 되돌아갈 용기가 없었다. 아니, 그녀에게 자신이 배신자임
을 인정하는 것이 죽기보다도 싫다고 하는 편이 맞는 말인지도 몰랐다. 역시 자신은 이기적
인 인간이었다. 묘한 오기가 그녀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약
속하며 가정을 지키려 하기보다는, 그녀를 거부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되는 억
지를 부린다는 걸 알면서도 상덕은 그녀 옆에서 비켜서고 싶었다.

아니, 자신은 결코 그녀 곁에서 도망칠 수 없으리란 걸 잘 알지만, 이미 자신으로 인해 되돌
릴 수 없는 상처를 그녀에게 주고 만 자신을, 스스로 벌주고 학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넌,
미순의 옆자리에 설 자격이 없는 놈이야. 너한텐 양심을 저버리고 선구자적인 사고와 의식
을 갖고 있는 영혼인척, 싸구려 사랑을 하는 우희라는 여자가 제격이지. 암, 그렇고 말고. .
." 이제 자신은 그녀에게, 아이들에게 돌아갈수 없었다. 모든 것은 끝이 났다. 그저 우희라는
여자 옆에서 자신의 상처를 위안 받으며 그렇게 살다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우희 라는 여자가 자신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을 아내와 자식에게 되돌아
갈 수 없는 염치없는 인간을 만들어 놓고 지금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고 있는 것이었
다. 절대 그렇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상덕은 뽀드득 이를 갈았다. "그렇게는 안 되지, 암
안 되고 말고. . ."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우희가 살고 있는 집의 골목길로 접어들던 상덕은
순간 주춤했다.

수줍은 웃음을 웃으며 웬 남자의 입술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혹시 잘 못 본 것은 아닐까. . . 머리를 흔들고 다시 흐려진 눈에 초점을 맞춰
앞에선 두 사람을 지켜보는 상덕의 눈에 비추어진 그 여자의 모습은 분명히 우희였고 그녀
는 지금 다른 젊은 남자 품에서 서로의 입술을 탐닉하며 서 있었던 것이다. 잠시후 그녀는
그 남자를 그대로 보내기가 아쉬운 듯, 집으로 돌아가려는 그 남자의 손을 잡고 그녀의 집
안으로 사라졌다. 결코 자신에게는 공개하지 않았던 금남의 방이라던 그녀의 방으로그녀 스
스로 그 남자의 손을 이끌어 집안으로 함께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상덕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지만 되돌아 그 골목길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하 하하. . .
허탈한 웃음을 웃으며 상덕은 목적지가 분명치 않은 곳을 향해 마냥 걷고 있었고, 그의 뒷
모습은 몹시도 비참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