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에 몸을 담그고 우희는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미순이란 여자! 지금껏 자신이 가지고 놀았던 여자들과는 사뭇 다른 여자였다.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믿어 의심치 않는 여자. 자신이 그동안 남편의 마음이 현재 자신에게 와 있다는 것을, 남편이 외도하고 있음을 수시로 느끼고 알게끔 증거를 남기고, 게다가 사랑을 잃은 여자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고도의 심리전으로 그 여자의 분노를 자극했지만, 모든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남편은 지금 잠깐 정신이 나갔을 뿐 다시 제자리를 찿을 거란 확신으로 똘똘 뭉쳐, 자신의 존재 따윈 안중에도 없이 아무 흔들림 없는 여자. 오히려 우희 자신이 더 그 여자로부터 모욕당하고 있다는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여자.
어떻게 그런 여자가 배신을 하면서도 잘못이라는 것 조차 느끼지 못하는 저런 인간을 남편
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미순이란 여자는 김상덕이란 남자가 품고 살기엔 너무도 그릇이
크고 대범한 여자였다. 그 여잔 자신과 남편이 주고받는 열정의 감정을 자제시키려 하기보
다는 다 겪고 느끼고 오라는 듯 멍석을 깔아 주고 있는 터였다. 무엇이 그 여인을 그렇듯
확고한 자신감을 갖고 버텨나가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우희는 그 여자가 내심 한심하고 답
답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여자의
아무런 상대가 되지 못한 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해야만 했다.
반응이 없는 싸움은 싱거울 뿐이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그렇듯 고고하고 흔들림이 없는지
지켜 볼 일이었다. 자신은 그저 지켜보고 즐기면 될 일이었지만 상덕은 지금 그렇지가 않았
다. 자신의 마음을 얻고 자신과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어했다. 어림없는 소리! 우희는 냉소
띤 얼굴로 앞면에 있는 전신거울에 비추인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한번도 남자를 유
혹하기로 마음먹어서 실패가 없었던 자신! 예쁘지도, 지적이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자신이
그처럼 남자들을 사로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남자들의 심리를 너무 잘 안다는 것과 그들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고 밀고 당기면서 남자들의 사냥본능을 자극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그것을 터득하는 것은 우희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 남자를 사냥한다는 것은
어떤 여자라도 마음만 먹으면 가능할 만큼 남자들에게 사랑이란 그저 유희나 게임일 수 있
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열계집 마다 않는 사내들의 욕심 덕분이
기도 했던 것이다. 간혹 절개와 지조가 깊은 남자가 있긴 했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그들 역시 무너지게 마련이었고, 걸려들지 않는 남자는 그야말로 찿아 보기 힘들었다. 물론
그런 남자가 세상에 얼마쯤 있기는 하겠지만, 우희는 남자의 지조나 정조를 믿지 않았다.
샤워를 마친 우희는 커다란 흰 타올로 몸을 두르고 전화를 걸었다. 전화통화를 하는 동안
내내 쏱아지는 웃음과 교태. 은밀한 속삭임. 진정 여자가 사랑을 느끼고 마음을 주는 상대에
게 나올 법한 몸짓과 목소리. . . 지금 우희가 통화하고 있는 상대는 절대 김 상덕이 아니었
다. 자신의 약혼자. 많은 남자들을 배신하게끔 만들고 그들이 수없이 배신하는 모습을 보아
왔음에 절대로 사랑 같은 건 하지 못할 것 같았던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주고 결혼하고 싶
은 남자였던 것이다. 우희는 너무도 염치없는 인간이었다. 자신이 유희로 망가뜨린 가정들을
지켜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남자와 진정한 사랑을 꿈꾸며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희가 결혼하고 싶은 이 남자는 순수, 그 자체를 지닌 남자였다. 먼지 한 톨도 묻어 있을
것 같지 않게 투명하고 진실한 남자. 우직하면서도 곰 같았지만 세상에 자신만을 사랑해줄
수 있는 이세상의 유일한 남자처럼 느껴진 그런 사람이었다. 너무도 고지식해서 융통성도
없고 재미없기는 했지만 우희는 그런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탐욕이 아닌 순수
한 사랑으로 매달리고 원하는 그가 믿음직스러웠다, 처음엔 답답한 어린아이처럼 느껴지기
도 했었지만, 그래서 그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놀아 보고 조롱하며 네 감정을 믿지 않는다
고 말해주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우희 는 진심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느
끼며 묘한 기분이 되곤 했다.
물론 그가 자신이 어떠한 여자란 것을 안다면 그 순간,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리란
건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흰 모든 것을 그가 알게 되기 전 이미 그 사람이 자신
을 떠나서는 살 수 없게끔 만들어 놓을 자신이 있었다. 지금 자신이 시작한 게임들이 종료
되고 나면 우희는 그 사람과 결혼 할 생각이었다. 나이 설흔 둘을 넘기게 되자 이제 어딘가
에 기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두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의 게임이
결혼과 맛 물려 돌아간다 해도 별로 상관할 바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남자는 자신의 그
런 이중생활을 전혀 모를 것이기에, 게다가 자신에게 미쳐있는 남자들이 당연히 자신과 가
족들의 행복을 위하여 써야 할 돈들을 빼돌려, 자신에게 쏱아 붓고 있는 경제적인 혜택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남자들에 대한 증오와 여자들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싶어 시작했던 우희의 사랑 놀음은 이제
그 모습이 변질되어 그들의 재물도 함께 노리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남자에게서 재물과 사
랑을 함께 얻어냈지만, 김 상덕, 그 인간은 생각했던 것 만큼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허우대만 멀쩡했지 너무 실속이 없었다. 가게까지 정리하고 자신과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고 큰소리는 치고 있지만, 자금이 그리 넉넉히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우희는 데이
트하는 동안 줄곧 자신에게 돈을 써왔던 상덕의 주머니가 비어가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음에
도 불구하고, 그 미순이란 여자를 꺽어 보기 위해 상덕의 자존심을 지켜줘가며 데이트 비용
을 요즈음은 자신이 거의 대부분 쓰고 있었다. 우희는 입맛이 썼다.
도데체 그 여잔 뭣 때문에 그 남잘 버리지 못하는 걸까? 우희가 보기에 그 남잔 그 여자가
모든 것을 바치며 참고 기다릴 만한 대단한 남자가 아니었다. 결코. 그 이상한 여자를 꺽어
보기 위해 하잘 것 없는 인간에게 자신이 그토록 많은 돈을 투자하고 다녔다니, 별 소득도,
그 여자가 미쳐 가는 꼴을 구경하게 된 것도 아닌데. . . 우희는 머리를 굴렸다. 꼭 그 여자
가 그 남자를 버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버려진 그 남자를 자신이 다시 버려야 했던
것이다. 자신의 와이프를 배신하고 가장의 자리를 버리고 우희 자신의 돈을 날리게 한 대가
로. . 그런데 어떤 방법이 먹혀들까? 우희는 생각을 바꿔 보기로 했다.
그 여자가 지켜주고 있는 남편과 아버지의 자리에서 김상덕을 끌어내려 길바닥에 패대기쳐
지게 할 수 있도록 그 여자가 남편을 버리게 될 이유를. . . 그래, 김 상덕, 넌 지금 네게 빠
져 있어. 날 철저하게 믿고 있지. 그런 나에게 버림을 받게 된다면? 후~, 아마 미쳐 날뛰게
될껄? 그 여자, 어쩌면 네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지금처럼 담담하게 자신의 자리
를 지켜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지, 너무나 남편을 사랑하니까. 어차피 아내에게서 버림 받
고 나면 내게서도 버림 받게 될 김상덕! 순서를 바꿔서 그 여자보다 내가 먼저 버려보자.
그럼 무너지는 그 남자를 보며 자신이 그 남자를 놓아 주는 것이 그 남자를 살리는 길이라
고 생각하고 그 남자를 버릴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리고 그 아픔으로 그 여자 스스로도 무
너지겠지. 그러면서 알게 될 거야. 자신을 지키는 유일 한 것은 세상에 자신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남자에게 모든 것을 걸고 그 남자에게서 아주 조금 베풀어지는 사랑이란 이름
에 모든 것을 거는 건 아주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그건 여자란 이름에 먹칠을 하는 아주
못된 근성이라는 걸. 그 여자는 알게 될 거야. 그리고 모든 여자가 알아야 해. 그 것 만이
여자가 여자를 미워하지 않고, 남자에게 당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