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순은 뒤집어 입고 들어 온 남편의 런닝을 무시하고 새로 갈아입을 속옷과 팬티를 내밀었다. 돌아서서 런닝을 벗는 남편의 등엔 여자의 손톱자국이 빨갛게 보였지만, 미순은 그것도 모른채 했다. 공연한 반찬투정에 퉁박을 줘도 "다음엔 잘 할께요" 하고는 더이상의 싸울거리를 만들지 않았다. 출근하려는 남편에게 가장 깨끗하고 세련돼 보이는 옷으로 꾸며주고, 향기가 좋은 새로 산 스킨을 남편에게 내 밀었다.
"얼굴이 조금 거칠어 보이는데 요즘 무슨 걱정 있어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미순을 아예 상대조차 않으면서 이제는 아이들에게 소용되는 돈이나
최소한의 생활비만을 조각내듯 쪼개주며, 미순에게는 단 한푼의 돈도 소용되지 않도록 하겠
다는 태도로, 너만 나가면 된다는식의 무언의 압력을 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결코 그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에게 변화가 생겼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우희와 일 외의 일로 너무 잦은 만남을 갖는 것이 아니냐는 미순의 말에, 사적인 자리에서
의 만남이 사회생활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알기나 하느냐며 무식한 여자 취급을
했다. 일. . .돈이 생기는 수단. . .그 일 때문에는 정도를 넘어, 가족의 마음에 상처와 아픔
을주고, 상식에 벗어난 일을 해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일까? 미순은 그를 향해 소리치고 싶
었지만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아빠를 믿고 사랑하는 딸들의 불안한 눈빛
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남편은 지금 홍역처럼 다가온 사추기를 겪고 있기에 그
기간동안 자신이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미순이 닦아 놓은 구두를 신고 대문 밖을 나서자, 미순은 어지럽게 흐트러진 집안을
둘러 보았다. 책이 빼꼭이 꽃혀 있는 아이들의 책상과 컴퓨터. . . 남편이 공부하고 일하는
서재. . . 그들의 미래가 담겨진 그들의 공간에 비해, 아무 미래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 자신
의 초라한 공간. . .설거지 통 속의 씻어야 할 그릇들. . .미순은 소리없이 주저앉았다. 아무
리 표나지 않고 힘든 일이었어도 자신의 노력과 사랑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의 꿈이
키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 하던 자신의 시간들이, 갑자기 아무 미래도 보장되어 지지
않은 서글픈 현실로 변해 있음에 분노하면서, 미순은 오래 동안 그 자리에서 숨죽여 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 . 아이들이 돌아 올 시간이 되자, 미순은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고 청
소를 하고 화장을 하며, 아이들을 향해 웃어 줄 미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미순은 남편
과 함께 이루려 했던 꿈들을 포기하고, 늦은 나이지만 자신의 일과 꿈을 새로 찿고 키워야
했다. 믿음과 신뢰가 빠진 상태에서의 미순의 가사일은 이제는 사랑이 아닌 희생일 뿐이기
에. . .바꿔 말하면 그것은 그들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일는 일이었다. 이제 미순은 자신
을 위햔 삶을 당당하게 살아내고 싶었다.
진작 나를 위한 시간들을 적립하고 써 왔다면 지금 이렇듯 힘들고 비참하진 않았을텐데. . .
자신의 꿈보다는, 남편의 꿈을 이루는 것이 함께 이뤄가야할 미래를 위해, 좀더 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보내왔던 지난날들을 모두 헛된 일이었다고 부정하기엔, 너무도 억울하고
도 허무한 일이었기에 미순은 그저 잊기로 했다. 남편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믿음속에 행복
해 하며 지내왔던 그 모든 시간이 마치 연기처럼 되어 버리고, 초라한 자신만이 남았을 뿐
이지만, 그와의 시간들을 모조리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나름대로 지난 세월 속에는 행복과 보람도 있었고, 그 시간 속에서 아이들이 저만큼 대견하
게 자라주지 않았던가. . 나름대로 자신을 위로하며 미순은 진정으로 자신에게 적합하고 이
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모든일들이 미순 마음 속으로부터
순서대로 정리되어 차근차근 진행되어지고 있었기에, 어느 누구도 미순에게 변화가 왔음을.
. .그녀가 자신만의 일을 시작하려하고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제 미순은 남편과 자식들이 자신의 전부였던 삶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만의 독립된 삶을
찿아 내가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자기자신을 버려두고, 남편을 통해 행복이 이뤄진다는
생각은 벗어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평온한 가정 속에서 자라나 결혼이라는 형식을
통해 남들에게 독립되어진 인격체로 인정받게 될 때까지, 아이들이 정상적인 가정에 안주할
수 있도록 자신이 모든 것을 참아 내야 한다는 것에 스스로 동의했다.
자신이 뿌려 놓은 씨앗들이 자라나, 자신과 같이 방황하고 아픈 일들을 겪게 하지 않게 하
기 위해서, 딸들 스스로도 자신을 위해 투자하고 자신의 미래를 가꾸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심어주는 일, 그것이 미순이 딸들에게 가르쳐야할 인생의 숙제이고 과제이므로 미
순은 자신의 몫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자신을 고통속에 그대로 놓아두고 새로운 자신의 출
발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제 미순은 남편에 의해 울고 웃는 인형이 아닌 자기 스스로의 삶
을 운영하는 자기자신의 주인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