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마치고 잡지사를 나서기 위해 화장실에 들른 우희는, 거울 속에 들여다보이는 자신의 얼굴과 몸매를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화장 안한 맨 얼굴. 평범하게 수수한 얼굴. 작은 키에 왜소한 체구. 얌전해 보이는 여자다움. 아무도 관심을 줄 것 같지 않은 외모덕분에, 오히려 많은 남자들을 자신의 뜻대로 만들기가 쉽다는 것을 우희 는 잘 알고 있었다.
소박하고 순진하게 보이는 인상은 어쩐지 편안하게 대해도 부담없을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
게 할 것이고, 외소한 체구는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할 것이었다.그리 예쁘지 않은 외모
에서 느껴지는 컴플렉스는, 오히려 남자들로부터 자신만을 사랑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고, 어쩌다 아내에게 들켜도 아내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지 않을 최적의 조건이라 생각할
것이었다. 우희는 밀고 당기는 심리전으로 남자들을 교묘하게 이용해 자신의 부를 축적해
나갔다.
한번쯤 외도를 꿈꾸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조건, 아내에게 립스틱 자국이나 화장품 냄새를
증거로 남길 염려가 없는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의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들여다 보고 옷매
무새를 다듬으며 우희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장소엔 김상덕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후 우희가 반가운
웃음을 웃으며 상덕에게 다가섰다. 만난 곳에서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음
식점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커다란 소나무가 양쪽에 가지를 드리우고 서있었고, 그 밑으론
하얀 조약돌들이 정갈하게 깔려져 징검다리 같이 박혀진 투박한 바위 돌 들을 더욱 더 돋
보이게 만들었다.
마당 한쪽 귀퉁이로 키 작은 대나무와 들꽃들이 이 집의 운치를 더욱 돋보이는 가운데, 안
내인의 안내를 받아 두 사람이 들어선 곳은, 한지로 곱게 바른 미닫이 문 뒤로 은은한 조명
이 비추어져, 마치 저녁 달빛을 연상케 하는 아담하고 조그마한 밀실이었다.
"이런 곳을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분위기가 아주 좋은데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밖에서 오래 기다리진 않으셨죠?"
"네, 마침 도착하자마자 오시는 것이 보이더군요. 오래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이곳 음식 중 가장 맛깔스러운 것으로 제가 양해도 없이 예약했는데. . ."
눈치를 살피며 묻는 우희 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쳐다보며 상덕 이 짖굳게 대답한다.
"뭐 니 입맛에만 맞으면 됐지, 내 입맛이야 어떨라구요."
뜻밖의 말에 우희 가 재밌어하며 웃자 상덕은 금방 우쭐대는 기분이 되어 떠들어대기 시작
했다. 아내이외의 여자와 이렇듯 단둘이 맛있는 식사를 나누며, 공통의 화제를 가지고 즐겁
게 이야기하며 유쾌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미묘한 느낌이 신선했다.
게다가 지금 내 앞에 있는 저 여자는 일 때문에 자신을 만났다고는 하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어쩐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만큼 다정하고 요염했다. 금방이라도 자신
이 손을 내밀기만 하면 자신의 품속으로 뛰어 들 것만 같았던 것이다. 남자의 본능으로 자
신의 삶에 하나쯤 가지고 싶은 비밀이 이 여자는 되어 줄 것 것이라는 생각을 상덕은 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상덕은 아내인 미순에게 일이라는 명목을 앞세우고 우희의 뜻대로, 그리고 자신
의 의도대로 전에는 기꺼이 자신과 공유하며 함께 나눴던 여러 가지 상황에서 미순을 따돌
리기 시작했다. 호기심과 남자의 본능으로 우희를 대하기 시작한 상덕은, 그녀와 둘만의 시
간을 만들며 그녀에게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상덕이 바라는 대로 우희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저 쉽게 넘어
올 듯 하다가도 금방이라도 도망 갈 듯 냉정하게 대하기도 하고, 일 때문에 만난 관계일 뿐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에 소심해 질라치면,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나 뜨
겁고 애절해서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들뜨는 느
낌과,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과 그리움. 그것은 이제 상덕 자신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고 상
덕은 믿고 있었다.
비가 몹시 오던 어느날. . .상덕이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디저트로 사과 한쪽을 막 베어 물
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여보, 전화 좀 받아주세요."
차를 준비하고 있던 미순이 상덕 에게 부탁했고 상덕이 집어든 수화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우희의 목소리였다.
"지금 나오실 수 있으세요? "
술로 축축하게 젖은 우희의 목소리는 미순에게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거짓말을 스스
럼없이 하게 만들었고 상덕은 친구아버지의 상가집이 아닌 어느 모텔에서, 그 여자의 작은
가슴과 가는 허리와 동그란 엉덩이를 입술로 핱고 깨물며 그렇게 원하던 비밀 하나를 만들
었다.
이제 상덕은 일 때문에 만나는 것 외에도 그 여자를 잠시라도 못 보면 미칠 것 같았다. 사
무실에 나가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아내인 미순이 말을 붙여 오는 것조차도 귀챦았다.
전에는 감각 있게 보여지던 미순의 조언도 모두 하챦고 쓸데없는 참견으로만 느껴질 만큼
상덕은 변해가고 있었다.
미순은 미순대로 요즘 남편이 전과는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에게 향한 공연한 짜증과 퉁박, 허공을 바라보며 뭔가 생각에 빠진 듯한 표정.
잦은 외출과 늦은 귀가. 피하는 듯 느껴지는 잠자리. 아무리 바빠도 꼭 참석했던 집안의 대
소사에 당장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이유로 불참하는 등 모든 것이 너무나 확연히 달라
지고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의 눈빛과 숨소리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감지 할 만큼 남편을 사랑하는 미순인
직감적으로 그 여자를 떠 올렸다. 그렇지만 이내 미순은 혼자 가슴을 쓸어 내리며 도리질했
다. "내가 미쳤어. 아무래도 나 의심하는 병이 들었나봐" 단호하게 상상을 뿌리치고 아무
일 없는 듯 일에 열중해 보지만, 허전하게 비어오는 가슴 한 자락의 텅 빈 외로움은, 서리맞
은 추운 겨울날 새벽녘보다도 더 차가운 한기로 느껴지며 불안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