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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에게 용돈을 주지 않았다며 서운함을 토로한 A씨의 사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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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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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동안


BY hl1lth 2001-03-30

병실에서 미순인 커튼 사이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금으로 물결치던 단풍잎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에 잎사귀들이 애처롭게 흔들리고 스산한 바람이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분주하게 만들고 있었다. 옛날 생각이 났다. 아주 오래 전 생각이. . . 토요일이면 남산의 산책로를 따라 그와 함께 걷곤 했는데 조용한 산 속에 지저귀는 낯익은 새소리와 시원한 바람은 늘 둘의 마음을 한가하고 풍요롭게 만들었었다.

여늬 때와 다름없이 산책로엔 젊은 남녀들이 쌍쌍히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손장난과
함께 키득거리며 장난치는 모습이 정겨웠고, 나무그늘 밑에서 다정한 모습으로 무엇인가를
속삭이는 모습들도 보였다. 가난한 젊은 한 쌍인 미순 이와 그도 자연 속에 묻혀 걷노라면
주머니엔 토큰 뿐 이어도 늘 행복했었고, 점심과 저녁을 걸러도 둘이 있으면 그저 행복했다.
천천히 산을 오르며 잡고 있는 둘의 손에 땀이 차도 여전히 손을 마주쥐고 남산 길을 걸으
면서 그가 말했었다. 네가 내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너만 옆에 있다면 내 인생은 황
금보다도 더 빛날 것이라고, 언제쯤이면 헤어지지 않고 아침에 네가 내 품안에서 잠 깰 수
있을지 그날이 기다려진다고,

미순 역시 그와 같았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그만이 중요했었다. 무엇이 둘을 그렇듯 서로
에게 집착하고 사랑하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서로를 간절히 원하고 사랑했었다. 현
실의 그 어떤 장애도 그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못했다. 그저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가 미순의 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한쪽 팔로 미순의 허리를 감고 부드러운 눈
으로 미순의 검고 긴 속눈썹에 드리워진 눈동자에 빠질 듯 뚫어져라 바라보며 뭔가를 간절
히 원하는 듯한 눈길을 주기 시작했을 때, 후두둑 거리며 나뭇잎들이 너울거린다 싶더니만,
때 아닌 장대비가 쏱아져 내리기 시작했고 젊은 남녀들이 산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작은 우산을 만들고 뛰어 내려가지만 비는 그것으로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어
느 틈에 그 꼭대기까지 우산 장수들이 뛰어 다니며 우산을 팔았고 연인들은 반갑게 우산을
사서 펼쳐들고 다정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지만 미순 과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주머니엔
달랑 토큰 몇 개 뿐 이었던 것이다. 그가 얼른 미순 의 손을 잡아끌며 나무 밑으로 비를 피
해 뛰어 들었다. 나무 밑에 쪼그리고 앉아 땅바닥으로 세차게 머리를 박고 다시 튀어 오르
는 물방울들이 마치 물보라를 일으키듯 하얗게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쪼그리고 앉아있던 미
순의 얇은 원피스는 어느덧 촉촉히 젖어들며 미순의 몸에 달라붙어 미순의 몸을 그대로 드
러나게 만들었고 이미 거세진 비 줄기를 피해 모두들 내려가 아무도 없는 그 남산에서, 쏱
아 지는 비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둘은 서로의 입술을 천천히 음미하고 있었다.

그 느낌은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강렬했었다. 미순의 젖어서 달라붙은 옷으로 모락모
락 김이 피어오르고 그의 손이 미순의 젖은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을 때 미순의 머리
속은 하얗게 아무 것도 저항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길고 진한 입맞춤으
로 포옹을 풀지 않았던 그의 손이 풀어지고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미처 그의 눈을 바라
보지 못 한 채 미순은 그의 손에 이끌려 비오는 남산 길을 꿈꾸듯 걸어내려 왔었다. 그랬다.
정말 그랬었다. 그 날 이후, 은행잎이 노랗게 깔리던 가을날에도, 흰 눈이 쏱아 지는 하얀
겨울날에도 개나리와 진달래와 하얀 벛꽃이 너무도 환하게 웃어주던 봄날에도 그들은 그 길
을 그렇게 다정하게 걸었었다. 그래, 정말 그랬었지. 옛일을 생각하던 미순의 뺨으로 주루룩
눈물이 흘러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