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다녀온 봉순이 엄마가 부엌으로 들어서며 봉순일 찿는다. "봉순아,~"
막내 동생인 현식을 등에 업고 흔들거리며 만화책을 보고있던 봉순이가, 아쉽게 책을 손에
서 놓으며 "왜요?" 하고는 방문을 열고 부엌 쪽으로 온다. "현식이 내려놓고 아래 우물에서
물 좀 길어 오너라." "물, 벌써 떨어졌어요?" "그래, 오늘 철이 오빠가 온다니까 빨리 서둘러
" "오빠 오늘 와요?" "그래, 오늘 오빠 온다." 봉순인 현식일 등에서 내려놓고 광 쪽으로 가,
아버지께서 봉순이 체격에 맞게 만들어 놓으신 지게를 꺼내 양쪽 쇠고리에 양동이를 끼워
들고는 아래동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철이 오빠는 봉순 이 외사촌 오빠다.
엄마가 이북에서 외할아버지와 피난길에 올랐을 때, 등에 네 살 박이 조카를 업고 있었다는
데 그 오빠가 철이 오빠인 것이다. 일 사 후퇴때, 외할아버지께서는 전쟁이 금방 끝나리라
믿으셨던 외할머니께서 "이제 금방 상태가 좋아질 테니 당신만 잠시 몸을 피하셨다 오세요"
라는 말씀에 혼자 길을 나서시다가 무슨생각을 하셨는지, 마침 손주를 업고있는 봉순의 엄
마에게 "금자야, 너는 아버지하고 같이 가자"하며 손을 잡아끄셨고, 그 바람에 그 길로 아
버지인 봉순이 외할아버지를 따라 이남으로 넘어 오게 되셨단다. 오빠의 아버지인 외삼촌께
서는 나중에 이남에서 만나긴 했었다는데, 일본으로 공부하러 가던 중 바다에서 풍랑을 만
나 돌아가셨다고 했다.
평양서 사셨던 외할아버지께서는 일제 때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거나, 독립운동 하시던 분들
을 몰래 뒤에서 도와주셨고, 그 때 도움 받았던 분들이 어떻게 알고 찿아와, 은혜 갚기를 원
하셨지만 사양하고 모두 돌려 보내셨을 만큼 강직하셨다. 봉순이 아버지는 그들의 호의를
할아버지께서 받아들이셨으면, 철이 오빠 앞날만큼은 탄탄대로가 될 수도 있었는데 하시면
서 늘 안타까워하셨지만, 외할아버지는 대쪽같은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셨고, 자신이 도움 주
었다는 이유로 그들의 호의를 받는 일을 사양하셨다.
피난생활을 하는도중, 엄마는 처녀 몸으로 조카를 키우다 보니 아기엄마로 오해도 많이 받
았었다고 하는데, 철이 오빠가 보채고 울 때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젖을 어린 조카에게 물
려 달랬었다고한다. 그런 만큼 엄마에게 오빠는, 조카라기보다는 자식 같은 사람이었다. 엄
마가 아버지와 만나 결혼 할 당시에 철이 오빤 국민학교 3 학년 이었는데, 외가집의 하나밖
에 남지 않은 혈손인지라, 외할아버지께서는 오빠를 애지중지 하셨고, 그 사랑이 지나치셔서
꾸짖어 가르치셔야 할 것조차도 모두 받아주기만 하셨다고 한다. 결혼 후 보다못한 아버지
께서 저러다 아이 버릇 나빠질까 염려하여 오빠의 잘못을 꾸짖어 가르치려했지만, 그때마다
"어미, 애비도 없는 아이에게 그러지말게" 하시며 외할아버지께서 우시는 통에 오빠의 잘못
에 대해선 무관심해 질 수밖에 없었다고도 한다. 말썽도 많이 부렸지만 오빠는 봉순이를 무
척 아꼈고, 어릴적엔 아장거리는 봉순일 늘 옆에 데리고 다니며 함께 놀아 주곤 했었다.
봉순이 아버지도 이북이 고향이신 황해도 분으로, 일 사 후퇴 때 단신으로 이남으로 넘어
오셨다가 남북이 가로 막혀 고향으로 돌아 갈 길이 막히자, 32살이 되도록 통일되면 고향
가서 어머님 앞에서 장가 갈꺼라며 독신을 고집하고 계셨다고 한다. 워낙 생활력이 강한데
다가 사람이 좋은 아버지를 눈여겨 보셨던 외할아버지께서는 "통일 돼 집에 가면 부모님께
결혼했다 인사 드리자,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장가가도 내 아무 말 안 하겠네"
하시며 아버지를 달래시고 각서까지 써줘가며 적극적으로 서두르셔서, 두 분의 혼인이 이루
어 졌다고 하는데. . . 결혼하던 날, 아버지께서는 이북 쪽을 바라보시며 밤새 우셨단다.
신혼여행을 다녀오신 후, 아버지께서는 "노인네와 어린애만 따로 살게 놔 둘 수 없읍니다,
이북 계신 내 부모님 생각해서 잘 뫼실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함께 사시지요" 하며 할아버
지와 조카를 신혼집으로 모시고 와, 두 사람에게 안방을 내어주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다락
방에서 지내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마음씀이 고마웠던 봉순이 어머니는 한번도 남편에게 거
스르는 일없이 남편을 존경하고 받들었지만, 결혼 후 3년이 지나서야 봉순을 얻게되고, 그
후 6년이 지나서야 동생들을 2살 터울로 셋을 두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봉순의 아버진 유난히도 봉순을 사랑했다. 보통은 엄마들이 딸들과 산나물도
캐러 다니고 사소한 예의범절등을 가르켰지만 봉순은 늘 아버지와 함께였다. 들에 뛰노는
개구리를 잡아 솔가지를 긁어 모닥불을 지피고, 그 위에 꼬챙이로 꿰어 이리저리 돌려가며
구어서는 봉순에게 먹거리로 주시고, 도너츠나 호빵 만드는 것등도 봉순은 아버지와 함께
했었다. 봉순이 친구들과 놀고 있으면 봉순의 아버진 사과나 배 같은 것을 넉넉하게 준비해
두었다가 어머니로 하여금 친구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하시고, 가끔은 군불을 지펴 군
고구마나 군밤, 콩 같은 것을 구워 주시기도 하였다. 봉순의 생일이되면 늘 잊지 않고 친구
들까지 불러다가 하다 못해 떡뽂기라도 만들어 나누어 먹게 하시고 설날이나 추석 땐 잊지
않고 새 옷을 준비해 주셨는데 모두들 어렵던 그 시절에 그러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이다.
봉순 이 엄마는 석유 곤로에 심지를 돋우고 성냥에 불을 댕겨 심지에 불을 붙였다. 석유 타
는 냄새가 매케 하게 나고 솥 단지 밑으로 그을음이 꺼멓게 올라오자, 봉순 이 엄마는 심지
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그을음이 가라앉고 불꽃이 피어 오른 곤로 위에 하얀 쌀밥을 앉혀
놓고, 뚝배기에 된장을 푼 후 고춧가루 한 수저를 함께 개어 된장이 골고루 풀어지도록 잘
저은 후, 앞마당에 심어 놓은 애호박도 숭숭 썰어 넣고, 풋고추도 손으로 뚝뚝 잘라 넣으며,
감자와 호박잎, 파, 두부 그리고 약간의 양파도 함께 썰어 넣은 뚝배기를 아궁이의 연탄 불
위에 올려놓았다. 정육점 아저씨가 듬성듬성 썰어 놓으신 고기를 다시 손보고, 고추장과 외
간장 으로 간을 한 후 양파와 풋고추와 파, 마늘을 넣고 손으로 바락바락 주물러 간이 골고
루 베도록 한 후, 한쪽으로 밀어 놓고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꽁치 대 여섯 마리를 연탄불
에 올린다.
봉순이 엄만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하면서도 조카이면서 아들 같은 철이를 더 애틋하게 생각
하고 있었다. 부모를 떠나 살게된 조카가 내심 마음에 걸려서지도 모르지만 처녀의 몸으로
자신의 젖을 물려가며 키웠던 철이를 큰아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
다. "타지않도록 잘 구어져야 할텐데. . ." 조카가 좋아하는 꽁치를 불에 올려놓고 봉순엄만
연탄구멍에 대고 부채질 하는 손이 바쁘다.
"엄마, 물길어 왔어요."
봉순 이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물을 쏱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런 걸음으로 부엌문으로 들어
선다. "어이구, 애썼다. " 봉순 의 조막만 한 등짝에서 지게를 벗겨 주고 항아리에 물을 쏱
아 부으며 봉순 엄마가 미소진다. "이젠 죄 쏱지 않고 잘 지고 오네, 빨리 잘 다녀왔구나"
"한 번 더 길어 올까요?" "아니다. 급하게 쓸 물은 됐다. 나가서 동생들 좀 건사하구~" "예"
부엌을 나선 봉순 인 지게랑 양동이를 광에 두고 나와 허리를 한번 뒤로 힘껏 제낀다. 집에
아직 우물이 없기 때문에 물은 늘 아랫동네까지 가서 길어 와야 했다. 대부분 아버지와 어
머니가 길어 오시지만 바쁜 날은 봉순 이도 거들었다. 한 번 물을 길어 오자면 어깨가 빠지
듯 하고 출렁이는 물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봉순인 아무 불평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