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세지-
한참을 그렇게 지나간 목소리들이 부르는 노래와 수다를 들은 다음에야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옷도 벗지 못한채 침대위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깨고 싶지 않은 깊은 잠에...
얼마를 그렇게 잤을까
내가 눈을 떴을땐 또다시 어두운 시간이었다. 아마도 하루를 그렇게 꼬박 잠이 들었었나 보다.
침대옆 테이블위에 자동응답전화기가 6개의 메세지를 가지고 있다고 껌벅 거렸다.
삐이~ 유리야...뭐하는거야? 어디 간거니? 몇번을 전화 했는데 연락도 안되고...이거 들음 전화해줘...
삐이~ 야...너 뭐해? 아직 안들어 온건가?
삐이~ 유리야...유리야...유리야...없나?
삐이~ 유리야....엄마다. 어디 갔니? 들으면 전화좀 해다오
삐이~ 유리야 아직 안들어 왔니? 나 효영이야. 들음 전화해줘...
삐이~ 나 효영이야. 아직인가? 전화해라.
한통 빼고는 효영의 전화가 전부였다.
아마도 그렇게 하고 헤어져서 내가 무척이나 걱정이 된거겠지..
난 도데체 얼마나 잔것인지... 온몸은 축 쳐지고 까닥하기도 싫을만큼 노곤했다.
하지만 효영을 위해서 전화기를 들었다.
아마도 무척 걱정 했을꺼란 생각에...
[네~ 유리도시입니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다.
[저...사장님좀 바꿔주세요. 친구에요]
[잠시 기다리십시요]
대기음악이 흐르고 잠시후에 효영의 목소리가 맑게 들린다.
[여보세요~]
[나야... 바쁘니?]
[야...너 뭐야... 이틀이나 연락두절이구...내가 전화 몇번이나 했는지 알아?]
효영이 화난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럼 내가 이틀이나 잠속에 있었다는 이야긴가? 화날만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틀이나 지난거니? 나 계속 잤어...아마두 몇일 못잔거 너랑 이야기 하고 나니 조금 마음이 가벼워 졌었나봐...미안하다]
효영은 바쁜지 수화기를 반쯤 가린듯한데 멀리 들리는 소리로 이것저것 지시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바(bar)가 오늘 손님이 많은가 보다.
[그래? 하여간에 지금은 좀 바쁘니깐 나중에 다시 통화 하자...살아 있음 된거구]
[그래...내가 다시 전화 할께...]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썰렁한 기운이 열린틈을 타고 나의 다리에 와서 서늘하게 닿았다.
언제 엄마가 다녀가셨는지 못보던 김치통과 반찬통들이 보였다. 여기저기 널려 있던 인스턴트 음식들과 먹다 남은 반찬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효영을 만나러 갔던날 엄마가 다녀 가셨나 보다.
하지만 나는 캔맥주 하나만 꺼내고 돌아섰다. 지금은 왠지 시원한 맥주를 마셔야 할것 같았다. 욕조로 가서 뜨거운 물을 틀어 받고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머리속은 아주 잠잠했다. 긴잠 덕분에 나는 아주 마음이 편했고 몸도 많이 릴랙스 되어 만족스러웠다. 혼란도 저만치 지나간 이야기 같았고 지금 이순간 만큼은 아주 평온했다.
오디오에 지나간 음악들이 담긴 시디를 틀고 더운김이 몰아 나오는 욕실로 가서 욕조에 몸을 담그고 맥주를 마셨다. 몸은 뜨거운 물속에 가라앉았는데 목으론 계속해서 차가운 맥주를 흘려 넣으니 머리속이 몽롱했다. 눈을 감았다. 그런데 왠지 나의 몽롱하고 편안한 기분과는 달리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는 점점 그것은 울음으로 변해서 흐느껴지고 나중엔 온몸이 들썩 거릴정도로 격한 울음이 되고 말았다.
옆에 걸려 있던 타월을 걷어 뭉쳐 끌어 안고 난 그렇게 한참을 마음속을 다 털어내듯이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물이 차가워 졌을때에야 나는 숨을 몰아쉬며 울음을 그칠수가 있었다.
아무것도 힘들지 않은데.... 이젠 더이상 슬픈것도 미운것도 없는데 무엇이 나를 이렇게 약한 모습으로 울게 했을까...
식어버린 물속으로 머리를 쑥 집어 넣어 숨을 참아 보았다. 살며시 눈을 떴을때 물속에서 이러저리 일렁거리는듯 보이는 나의 벗은 몸을 보았고 그것은 적당히 왜곡되어 일정한 모습이지 않았다. 한참을 참던 숨이 터졌을때야 비로소 머리를 들었다.
추웠다. 일어나 뜨거운 물을 다시 틀어 샤워를 하고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았다. 왠지 몇일사이 늙어 버린것 같은 내 모습과 젖어서 이리저리 붙은 머리카락이 흉물스러웠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위에 누워서 천정에 달린 등을 그저 무심히 바라본다.
눈이 시려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너무 피곤했다.
왠지 잠이 들면 또다시 깊은 수렁속으로 빠져들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전화벨이 울렸다.
5번 벨이 울리고 나니 자동응답기가 돌아갔다.
[유리씨댁입니까? 전 영미 남편입니다. 급하게 연락드릴일이 있읍니다. 모르는 분께 실례지만 연락 주십시요. 제 전화번호는 011-356- ****입니다. 기다리겠읍니다]
난 전화를 받을까 생각하다가 그 낯설은 중년남성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흠칫해져서 그만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영미의 남편이 전혀 모르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찾을까?
시계를 보니 지금 새벽1시가 넘어선 시간이었다.
난 잠시 망설였지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어번쯤 울리고 나서 자동응답기속에 있던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혹시 유리씹니까?]
그 사람은 대뜸 나의 이름을 불렀다.
[네...맞읍니다만...이 시간에 무슨...]
그 사람은 한참을 망설이는듯 하더니 말했다.
[영미가 유리씨를 보고 싶어 합니다. 늦은 시간에 실례인줄 알면서 전화 드렸읍니다.
실은 영미.... 병원에 있읍니다. 괜찮으시다면 지금좀 와주시겠읍니까?]
[병원에요? 왜죠? 무슨일이 있는건가요?]
[오시면 아실겁니다. 여긴 이대목동병원입니다. 제가 지금 기사와 차를 보내드리겠읍니다. ]
난 어찌해야 할까 순간적으로 생각했지만 승락하고 말았다.
영미가 나를 이 늦은 시간에 병원에서 찾는다니...
서둘러 옷을 입고 머리를 말리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저 신유리씨 되십니까? 밑에 차 대기 시켰읍니다. 내려 오시죠. 검은색 벤츠 2459번 입니다]
깍듯한 목소리의 젊은 목소리의 남자였다.
[네 금방 내려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