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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BY teaser1 2001-04-12

- 목소리 -

효영과 나는 아무말도 없이 매실차가 담긴 컵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오랜 침묵후에 효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영미가 결혼을 했다구....]
탄식처럼 한마디 내뱉고는 또 다시 침묵이다. 나두 무언가 할말을 찾지 못하고 도로를 향해난 큰창을 통해 지나는 차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 효영이 말했다.
[그럼 넌 어떻게 되는거니? 준하씨는? 어떻게 그럴수가 있니? 너랑 준하씨 망쳐 놓은게 도데체 누구야...]조금은 화가 난듯한 효영의 목소리...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저 효영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누가 누구를 망친것일까... 정말 영미는 나와 준하를 망쳐 놓은것일까?

[영미만 아니었으면 너랑 준하씨 지금쯤 이쁜 아기도 있고 아주 좋은 부부가 되었을꺼야.... 그런데 자기는 혼자 소식도 없이 사라져서 다른 남자랑 결혼을 해?]
효영은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양 눈에 눈물까지 분한듯 어려있다.
정말 난 영미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준하랑 다른 많은 부부들처럼 살고 있을수 있었을까? 자신 없다... 고개를 휘이 저어본다.

[아니야...효영아...
아마두 나랑 준하는 결혼안했을꺼야... 아마두 우리 인연은 여기가 끝이었겠지...그리고 영미도 마찬가지구 말야...누가 누구에게 잘못했고 그런건 아니야...]
그래...분명히 이건 그저 우리의 얽힌 인연의 고리탓이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래서....준하씨 소식은 전했어? 그리고 준하씨 한테 그 이야기는 했니?]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효영이 묻는다.

[글쎄...그냥 잘 있다고만 영미에게 말했어...그리고 준하에겐 말해야 하는지 아닌지 아직도 결정 못했어....아무리 출가해서 이젠 속세와의 인연이랑 거리가 있는 사람이지만 혹시나 그 마음속에 영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지...어떤 기대감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는데....]

효영이 아까 빼앗아간 담배를 다시 돌려준다.
[피워....이거라도 피워야지... 너 속상한 마음 달래줄게 뭐가 있겠어...담배라도 피워라...] 효영은 짠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난 효영이 돌려주는 담배를 받아 불을 당겼다. 가슴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오는 담배연기가 왠지 오늘따라 독하다.

[그래서....영미는 어디 살고 있다던?
그렇게 가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그래? ] 효영의 질문에 이틀전 만났던 영미의 조금은 지쳐 보이던 갸날픈 모습이 오버랩된다.
[글쎄...행복해 보이는지 모르겠는데...
왠지 조금 지쳐 보이는거 같았는데 모르겠어...]
[독한년....영미는 그렇게 갸날프고 가련한 모습을 해가지고 생각보다 독해....마치 독을 품은 들꽃같아 보여...]
효영은 창밖으로 시선을 주며 툭 내뱉는다...
독을 품은 갸날픈 들꽃....

잠시 더 우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곳을 나왔다. 효영에게 말을 하고 나니 그래도 왠지 조금은 머리속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왠지 오늘은 푹 잠이 들수 있을꺼 같았다.

효영과 헤어지고 돌아서 나는 차를 몰고 무작정 어디론가 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대학로 근처의 작은 찻집으로 가고 말았다.
오늘은 왠지 젊은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그런 모습은 볼수가 없다.
쓰디쓴 커피한잔을 앞에두고 난 그저 멍하게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을뿐이었다.
머리속도 말갛고 마음속도 말갛게 모든 앙금이 가라앉은 느낌이라고 할까...
얼마가 지났는지 알수 없었는데 벌써 하늘로 부터 어둠이 내려오고 창밖의 어둠속으로 하나둘 가로등이 밝아오고 있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잔을 뒤로하고 그런 어둠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낮보다는 조금 많아진 젊은 사람들 속에 난 그렇게 바람처럼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사람들 속을 걷다가 차로 돌아왔다. 차안에 앉아서 담배를 한대 꺼내물었다. 차안에 볶은 커피향기처럼 담배냄새가 내려앉았다.

난 문득 콘솔을 열어서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낡은 카세트테이프를 찾아 꺼내들었다. 싸구려 프라스틱 테이프를 카오디오로 밀어 넣었다. 리와인드를 해서 플레이를 누르자 귀에 익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깔깔거리며 웃는 좀더 젊은 나의 목소리....그리고 낮은 저음의 준하의 목소리와 조용조용한 영미의 목소리까지....
준하가 마이크를 테스트 하듯이 몇번 이상한 소리를 내고는 뒤로 들리는 반주에 맞추어서 노래를 불렀다.

이문세의 노래를 아주 그럴듯하게 불러대는 준하... 그리고 아이처럼 소리를 질러대는 나....그리고 조용한 영미...
우리의 젊은 날...행복했고 서로 사랑했던 그 시절의 목소리들이 마치 망령처럼 차안은 가득 메우고 나의 뺨위로 눈물이 조용히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