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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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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BY 유수진 2001-05-16

"민춤한 놈...
정리할 양이면 얼른 정리하고,
들일 양이면 결혼 생활 청산 할 일이지.
탕정 오래 끌면 패가 망신이야! 이놈아."

"아유~ 작은 언니.
그만 좀 해.
애 잡겠어.
쟤 몰골 좀 봐. 꼭 10년 묵은 홀아비 꼴을 하고...
쯧쯧...
인희 걔 성질에 애를 얼마나 들들 볶았으면...."


"조강지처 놔두고 음충 떤 놈이, 얼굴에 개기름 흐르면 진짜 쳐 죽일 놈이지!"

연신, 담배를 쪽쪽 거리며, 간암으로 1년여 투병한 빛이 역력한 해남의 큰 이모가 가래 섞인 목소리를 그르렁 거리며 내뱉듯이 말했다.

집안의 내력인 풍체 만큼은 아직 병도 침범하지 못한 모습 이었다.

"큰언닌, 누구 편이야?
아무리 대역죄인이라도 핏줄로 당기는거 당연한게지.
인희 걔,
워낙 뚱하고, 애교라고는 모기 뒷다리 만큼도 없으니, 해남이도 할말있는 거야. 뭐.
자고로,
여우는 데리고 살아도, 곰은 못데리고 산다잖아."

쌍커풀 수술을 한데다 진한 화장으로 더 도드라져 튀어나온 눈을 흘기며 아담하고 뚱뚱한 체구의 해남의 작은 이모가 말했다.

"그래!
나, 곰탱이라 느이 형부 바람 피워도 찍소리 한번 못하고 살았다."

큰이모의 쉰 목소리가 커지자, 해남의 모친이 꽥 소리를 질렀다.

"언니, 영자 다 그만해!
불난집에 부채질 하는 거야. 들...
어이구~
내가 저놈 때문에 와석종신(臥席終身) 못하고 죽지.
조상님들 얼굴을 어떻게 볼거야."

해남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어! 이눔아.
무슨 일을 맺고 끊지 않고 언거번거하게 늘어만 놔.
매듭을 지어야 할거 아니야!"

"아유~
언니.
내일 해남이 회사 출근 하는데 지가 안들어 오겠어.
내일 들어 올거니까 애 너무 잡지마.
해남아,
가서 고스톱판에나 끼어.
이런때 일수록 머리를 바쁘게 굴려야지, 몸 축난다."

작은 이모는 해남의 등을 떠밀며 눈짓을 했지만, 이내 큰이모의 고성에 가던 걸음을 더이상 떼지 못했다.

"매친년!
밀통질 해 댄게 무슨 유세라고 가납사니 지껄여 대고 지랄이야.
내가 저년 꼴 보기 싫어서 까꾸러지기 전에 일어 나야지.
나, 간다!"

"언니!
조카 듣는데 잘한다.
언닌 어째 울타리 밖을 모르우.
요새, 바람 한번 안 피우는게 어디 남자유.
돈 없고, 어디 한군데 병신들이나 여편네 치마속이나 살피고 있지."

"역지사지(易地思之)해봐. 이년아.
니가 딸 없고, 니 남편이 니 치마속 구경이나 하니까 그 입장이 안되봐서 그런 소리 지껄여 대는 게지."

"언니,
어째 말속에 뼈가 있다.
그래,
언니 잘났수.
언닌 딸도 있고, 송서방이랑 형부가 바람 났었으니 잘도 역지인지
사지인지 알겠지."

"뭐야!
이년이 지금...
니년이랑 나랑 19년 차이여.
부모 매한가지란 말여.
어따 대고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

"아이고오~
그만들 좀 해!
정말 왜들 이래.
정초부터 며늘년이 집을 나가지를 않나.
싸움 구경까지 할 심정 아니란 말야.
영자 너도,
빨리 큰언니 한테 사과해.
말머리 하고는...
언니,
언니도 가실양이면 빨리 가요.
나 좀 누워야겠어.
아이고 머리야...

해남이 너!
이달 안으로 일 다 마무리 지어!
알았지!"

해남의 모친과 같은 톤으로 큰이모가 말을 받아 이었다.

"해남이 너!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이다.
열흘 붉은 꽃 없듯,
한번 성한것이 영원히 성할듯 싶냐.
너도 늙어 이녀석아.
함부로 휘둘르고 다니다 큰코 다쳐.
이모부 봐라. 다 늙어 객사 한거."

"아유~
금례 언니!
그만 좀 해.
나 좀 눕자.
얼른 나가! 이놈아....꼴도 보기 싫어."







'짤칵'

인희의 집 현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정실은
음식물 쓰레기를 속 시원하게 비우고 오는 길이었다.

이틀전,
동네 슈퍼에서 인희네 시집 사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계속 인희를 찾았지만, 구정 마지막날 밤 지금 까지도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바로 옆집 이웃지기로서 걱정도 되고, 인희의 용기 있는 행동에 호기심반 부러움을 느끼며 노동절날의 가출에 대해 소감을 듣고 싶었는데....

아파트 주변을 휘 둘러 보았다.

구정 연휴 마지막 날인데도 창밖으로 흘러 나오는 불빛은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싸늘하고 맑은 밤공기를 깊숙히 들이키고는 정실은 자신의 집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다.

그리고, 남의집에라도 들어 가는 것처럼 마뜩찮게 몸을 집어 넣었다.

"아유 아가...
내가 갖다 버린대니깐..."

남편 경규가 양복 차림에, 주걱으로 구두를 움질 대는 뒤로, 시어머니가 난처한듯 입을 실그러뜨리며 정실의 음식물 쓰레기통을 빼앗듯 낚아챘다.

시어머니는 당황하거나 난처할때 항상 입술을 실긋대는 버릇이 있었다.

정실은 냉소를 담은 눈빛으로 경규와 맞딱뜨렸다.

"내일,
곧바로 회사 출근 할거야.
잘 자."

또박 또박 말하고는 정실의 어깨를 스쳐 지나 현관문속으로 사라지는 남편.

"꽃숲 에미야.
커피 타주랴?"

"고모한테....
언제 전화 왔어요?"

정실은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무표정 하게 중얼거렸다.

시어머니는 법랑 주전자에 수돗물을 틀어 놓고는 떠듬 떠듬 말했다.

"으응....
그...
그...오전...오전인가?
아...아!
점심 먹고 한 두....두시쯤....."

시어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실은 현관문을 열고 뛰어 나갔다.

아파트 2층을 단숨에 뛰어 내려온 그녀는, 주차장 입구에 장승처럼 서서 칠흙같은 어둠속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그녀의 시야를 덮쳤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차는,
다행히 주차장 언덕을 올라오기 전에 그녀의 아이보리색 임부복을 감지 한듯 느긋하게 멈췄다.

그리고,
경규는 말쑥한 모습으로 그녀를 향해 걸어 올라왔다.

마치,
새벽녘 출근 하는듯한 장면 이었다.

"꽃숲 엄마!
무슨 일이야?"

정실은 넋 나간 눈빛이었다.

"꽃숲엄마....?"

"가지마!"

"....."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왜이래."

"왜 이러냐구."

"그래!
왜이래."

"자기는...
변했어!"

"뭐가?"

"어머니가 말아먹은 빚 때문에 길거리로 나 앉아, 입에 풀칠하기 급급했을 때에는...
그래도 이렇진 않았어."

"뭐가 어떤데."

"적어도..
적어도 자존심은 있었어.
적어도 나에게 미안해 하는 기색은 있었다구.
그런데,
지금은 이게 뭐야.
왜 그렇게 익숙하고 당연한 표정 이냐구."

"목소리 좀 낮춰!"

"지금, 이마당에 창피한게 있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창피하고, 정작 자기 아내인 나한테, 우리 아이들, 아니, 이 배속에 당신 새끼 한테는 부끄러운 마음 안드냐구!"

"너!
왜이래!
지금 나 좋자고 이러는 거야.
요즘 부쩍 왜 이러는 거야. 자꾸!

나도 그 늙은 여자 몸뚱아리 냄새나고 구역질 나.
좋아서 이 짓 하는 줄 아느냐고!"

경규의 목소리도 어느새 정실의 톤과 같아져 있었다.

"아파트 사주고, 차 사주고, 일자리 주고, 돈주고 할 때에는
방관만 하고 있더니, 이제와서 왜 이 지랄이야.
제기랄..."

경규는 잔뜩 화가 난 기세로 뛰어 내려 가더니, 거칠게 시동을 걸었다.

'부릉 부릉 부릉 부릉 부릉 부릉-'

정실은
사납게 멀리 달아나는 남편의 차를 맥없이 보고 서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