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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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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BY 유수진 2001-01-31

'우우우우우웅~ 그릉 그릉 그릉 크르~~'

거구의 몸을 활짝 펼친체, 잔뜩 덮칠 기세로 달려드는 무시무시한 파도.

온통 벌린 시커먼 목구멍으로 뿜어내는 포효하는 짐승의 울음 소리가 천지를 진동 시킨다.

마치, 파도를 품은 바다의 부산물인듯 느껴지는 하찮은 형체가, 파도의 목구멍 속으로 뛰어 들듯 흔들거리며, 악착같이 달려드는 성난 파도를 희롱하고 있다.

혹독한 겨울 바람을 휘둘러 대는 을씨년 스러운 강원도 삼척의 바닷가는, 파도의 비명 소리로도 충분히 어수선 했다.

인희는 자신의 키보다 몇척이나 높은 파도의 기세에도 아랑곳없이, 위험 수위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가고 있었다.

'쿠아앙~ 쿠~'

거대한 파도가 온몸을 쭈욱 펴서 낚아 채려는 기세에, 흠칫 놀란 그녀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잠시 얼어 붙은듯 서 있던 인희의 모습은, 2월 구정의 영하기온과 혹독한 바람에는 다소 얇은 차림새였다.

집에서 입던 검은색 쫄바지에, 얻어 입은것 마냥 부-해 보이는 곤색 패딩 잠바가 그녀가 걸친 옷 전부였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는 구정 차례상을 차리다 말고 무작정 눈에 보이는 남편 잠바에 손지갑만 달랑 들고 시집을 뛰쳐 나왔다.

결혼 생활 5년만에 인희는 큰일을 저질러 버린 것이다.




"너,
어른이 말하면 대꾸를 해야지....
참 나원~ 애도....
속 터져서.....

해남이가 그럴만 하네."

"어머니!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얘 좀 봐."

"어머니!
지금 뭐라고 하셨냐구요!"

"아이구 아이구
얘가.....

너 지금 소리 지른 거냐?"

"네!
소리 지른 거에요.
해남이가 그럴만 하다구요!

제가 미련 곰탱이 같아서...
그래서 바람필만 하다구요!

어머니,
지금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너 이제 막 나가는 구나.
니 남편 바람 피는걸 누구한테 화풀이하고 있어. 얘가....

차례상 차리면서 입 뚝 내밀고, 어른들 말씀 하시는데 대꾸도 안하고...
니가 그럼 잘 한 거냐?!"

"제가 지금 이 상황에..."

"그만해!
어디다 대고 말대꾸야!
얼른 어머니한테 사과 드리지 못해!"

너무나 당당한 두 모자,
그리고 시친척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들을 제친체 퇴장했던 모습에, 인희는 뺨위에 그대로 얼어버린 눈물딱지를 부질없이 훔치며,
다시 기지게를 켜고 있는 파도와 맞섰다.





'쨍-'

'띠리리리- 띠리리리-.....'

"잠깐만!"

"네에~ 미림 횟집입니다.

아! 엄마.
응.....
친구랑 먹고 들어왔어.
구정이라 손님도 없어.

미림이 아침에 동그랑땡 남은거 데워서 줘.
응.....
자. 기다리지 말구....늦을 거야.

그래, 미림아. 할머니랑 잘 놀았어?
....동그랑땡이랑 밥먹고...
응~ 잘자. 엄마도 사랑해."

술잔의 술을 입안에 털어넣고 다시 잔을 채우는 인희를,
보람이 구들목 위를 냉큼 뛰어 올라 낚아 챘다.

"야!
느이 신랑 그렇게 잘 생기지도 않았던거 같은데 자작하냐."

술잔이 채워지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인희는 '풋'하고 메마른 미소를 날렸다.

"그래. 보람아...
그 새끼, 잘 생기지도 않았는데...."

뜨악하니 인희를 살피던 보람이 걸걸하게 한마디 던졌다.

"그런류의 대사는 내 트레이드 마크 아니였냐?"

인희는 응등그려져 있던 몸이, 술기운에 느즈러지면서
스치는 행복감에 잠시 어리둥절 했다.

그리고, 보람을 관찰할 만한 여유까지 부렸다.

보람은,
시장통 거친 아낙의 모습이었다.
손질하기 쉬운 짧은 파마 머리에, 여전히 작은키,
서른 한살의 나이보다 10년은 늙어 보였다.



"보람이....넌.....
묻지도 않는구나.
안봐도 비디오다 이거니.
내 몰골로...."

"여전하구나. 오바 하는건....

그래.....
가끔 잊어버릴만하면 안부나 묻던 동창 친구가 3년여만에 이혼한 친구를 찾아 멀리 서울서 강원도 까지 날아왔다.
그것도 며느리들 노동절날....

몰골 살필 필요도 없지 않냐.

싸웠냐?"

"누구랑?"

"무슨 대답이 그러냐?"

"누구랑 싸웠냐고 질문하는거야?"

"너....
전쟁 났냐?"

"전쟁?"

"그래...
남편 포함해서 시집 사람들 다 들고 일어났냐고..."

"후후....
정말 멋나버린 표현이다."

머리까지 뒤로 제끼며 술을 들이키던 인희는,
달관한 표정으로 술잔을 채워주는 보람에게 불현듯 의지하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사회물 먹으면서 연락두절 했던 고등학교 단짝 친구.
그리고, 동창회에서 재회 했지만, 결혼 생활에 정신 없어 서먹서먹하게 안부만 의례적으로 나눴었다.
그나마 그것도 보람이 이혼을 하면서 자취를 감춰버리는 바람에, 친구들 입소문으로 무성한 억측만 나돌다가, 인희도 남편의 외도로 동창회에서 모습을 감춘지 3년여가 지났다.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전화 해서는, 아직도 이혼 하지 않고 그자리에 버티고 있는지 확인하는 동창 친구들이, 안주꺼리 삼아 씹어댔던 보람 대신, 자신을 씹어대는 모습이 눈에 선했었다.

그렇게 무심했던 인희가 의타심을,
그런 염치없는 생각을 할 만큼 상황이 절박했다.


죽을 용기조차 바다 위에 내 팽게쳐 버리고 문득 정신을 차리자,
무서운 허기와, 칠흙같은 어둠과 그리고 암담한 현실, 게다가
의지가지없는 땅을 밟고 있었다.

지갑속 깊숙히 묻혀있던 전화번호 수첩을 뒤적거려, 언젠가 동창회에서 보람이 강원도 어딘가에 터전을 잡았다는 것을 기억해 내, 알만한 친구를 통해 연락을 이은 것이다.

인희는
동변상련을 느끼면서도, 보람은 이미 거친 파도를 뛰어넘은 잔물결 같았고, 그녀 자신은 몇시간 전의 포효하는 파도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파도 조각 같았다.

무의식속에서 신음같은 대사가 그녀 자신도 모르게 흘러 나왔다.

"넌....
완료형,
난.....
진행형....."

뜬금없는 인희의 한숨같은 소리에 보람은 오징어 회를 질겅 거리며 말을 받았다.

"뭐....
이혼이....?"

체험자의 견해를 기웃 거린다는 것이,
친구의 아픈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인희는 재빨리 수습 하려고 했다.

"아!
미안해.
과거사 들춰서 힘들게 하려고 온거 아닌데....
내가 지금....
그래, 마음이.....여유가 없다. 지금....
정말....미안해."

보람은 서론 본론 결론 다 내서 북치고 장구 치는 인희가, 학창시절이랑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핏기없는 혈색이며, 통통하던 볼은 움푹 패여 각이져 있는 날카로운 모습이, 몹시 측은해 보였다.

"인희야...."

"...응...."

"인생에 있어 '완료'는 없어.
이혼도 결혼과 마찬 가지로 또 다른 인생의 시작이야.

그렇다고 해서 이혼 하면 무조건 불행해 진다거나, 무조건 더 나은 인생이 펼쳐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똑같아."

보람은 술잔의 술을 연거푸 들이키고는 날쌔게 뛰어가 가게의 셔터를 내렸다.

인희는 셔터를 내리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보람의 투박하고 퉁퉁 불어 터진 벌건 손마디에서, 그녀 혼자 감당해 냈을 질곡의 세월들을 유추해 보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