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같은 여자 7
"이제 따님 속 고만 썩히셔요. 아, 한 마디라도 좋으니까 말씀 좀 해보셔요, 글쎄."
복도 벽에 기대선 채 병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고 서 있는 영신의 귀에 엄마와 같은 병실을 쓰고 있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신은 눈가를 옷고름으로 꼭꼭 눌러 울었던 흔적을 없애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참으려 허공을 올려다 보면 눈물은 이번엔 두 눈가를 지나 귓볼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의식을 차린 이후로 영신을 알아보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초점잃은 눈을 그나마 거의 뜨지도 않고 한 마디 말도 없이 벌써 며칠째다. 정신과 의사 말로는 심한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 실어증이라고....
"아침도 뜨는 둥 마는 둥, 점심은 아예 걸르고, 저녁은 국물만 마시 고.....아, 배도 안 고프슈? 거기다 왜 입은 꾹 다물고 있는 거냐구우."
아주머니의 유난히 큰 목소리가 또다시 병원복도로 새 나왔다. 영신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조금 열려진 병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하이고, 아직도 안 먹었어. 안 먹어, 당췌. 아주 고집이 황소심줄이야. 저 양반 말 안하는 거 의사 부를 필요없어. 순전히 고집이라구, 고집."
영신은 말없이 침대 옆 의자에 가서 앉았다. 엄마는 눈을 감고 있었다. 얼굴의 부기도 많이 내리고 상처도 아물었지만 엄마의 입술은 처음 그대로 굳게 닫혀진 채 가느다란 숨줄기도 내보내려 하지 않고 있었다.
'엄마....나, 지금 어느 때보다 엄마가 필요해....엄마, 나 좀 도와 줘.'
영신은 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성국의 시신이 불태워져 한 줌 재로 변해 춘천 어느께 강물에 뿌려진다고 했다. 성국의 따뜻한 손이, 그 가슴이, 그 밝은 웃음이 한 줌의 가루로 변해 그 아득히 넓은 강 어딘가로 날아간다고 했다. 하지만 영신은 그 곳이 어딘지, 어딘지 알아도 여전히 감히 그 주변에 얼씬거려서는 안되는 사람이었다.
지금이라도 집에 돌아가면 앞치마를 두르고 얼굴에 밀가루를 잔뜩 묻힌 채 영신이 좋아하는 칼국수를 끓였다며 웃는 얼굴로 반겨줄 것만 같은 성국이 이제 정말 영영 영신의 곁을 떠나려 하고 있었지만 그 앞에서 영신은 이렇게도 무력하기만 한 것을.....그저 성국을 따라 가서 이 걷잡을 수 없는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성국이 없는 세상에 내버려져 혼자 짊어져야 할 그 지독할 슬픔의 무게를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영신에겐.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엄마 때문이었다.
아버지....
그 까칠까칠한 수염을 얼굴에 비벼대 결국 앙앙 울음보를 터뜨리는 영신을 재밌어하던 아버지,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더이상 그 까칠한 얼굴을 비벼주지 못하게 되버려 이제는 영신이 그 따가운 촉감을 그리워하게 만들어버린 아버지. 언제나 노란색 셔츠만 입고 있어서 지금도 봄마다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개나리만 보면 가슴 뭉클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게 고작이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남편이 결국 다른 여자를 집으로 끌어들이던 날, 입고 있던 그 옷 그대로 집을 뛰쳐나와 엄마는 오랫동안 깊은 한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했다.
우연히 만난 친절한 택시 운전수와 서른 넘어 재혼을 한 엄마는 바로 다음해에 영신을 낳았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영신은 엄마에게 있어 단순한 남편과 자식,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다시 찾은 사랑, 다시 찾은 생명, 다시 찾은 행복....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린 영신의 눈에도 엄마는 실성한 사람처럼 보였다. 아무나 보고 히죽거리고 문득 큰소리로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뛰쳐나가고...하지만 엄마는 영신을 부둥켜안고 앉은 자세 그대로 하얗게 밤을 지새우고 난 다음 날, 다시 재봉틀 앞에 앉았다.
깜박깜박 졸린 눈을 부비며 일어난 아침, 하얗게 들이치는 아침 햇살 속에 돌아앉아 있던 엄마의 웅크린 등을 영신은 또렷이 기억한다.
그런 엄마는 자신의 생일을 모셔주겠다며 마다해도 마다해도 모시러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그 사위를 아버지가 비명에 가신 그 고속도로에서 또다시 잃고 만 것이다.
눈을 뜨고 의식을 회복하고 영신을 바라보며 초점을 맞추던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성국이 어떻게 되었는지,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어디인지, 얼마나 무서운 사고가 있었는지 엄마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엄마는 그저 영신에게 맞춘 초점을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의사가 와서 이곳저곳을 살펴볼 때도 엄마의 시선만은 결코 영신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엄마는 영신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야 할 말이, 너무나도 간절하게 해야만 할 말이 있었지만 차마 입밖으로 낼 수는 없는 말이 있었던 것이다. 입을 연다는 것이 너무나 큰 죄악처럼 느껴졌으리라. 이렇게 살아 딸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된 것은 더할 나위없는 축복이었지만 또 이렇게 혼자만 살아 입을 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착한 엄마에겐 너무나 큰 형벌이 될 수 있었음을 영신은 알고 있었다.
영신은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갖다대었다. 엄마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떴다. 엄마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가 싶더니 곧바로 베개 위로 흘러내렸다. 엄마는 영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또다시 전의 그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영신은 엄마의 손을 꽉 움켜 쥐었다. 무언의 약속이었다. 두 사람 모두 한 마디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가슴 속으로 외치는 무언의 절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영신아, 안 돼. 안 돼. 절대 안 돼....'
'엄마, 걱정말아요. 엄마 혼자 두고 안 갈게. 엄마 혼자 버려두고 나, 안 갈께.'
영신은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지만 결국 엄마처럼 뜨거운 눈물을 쏟아놓고야 말았다.엄마의 손에 눈물이 젖어들었다. 엄마의 손에 힘이 주어졌다. 그리고는 이젠 엄마 쪽에서 영신의 손을 꼬옥 쥐었다. 영신은 고개를 들어 엄마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엄마의 바싹 마른 입술이 너무나도 힘들게 달싹였다.
"....영신아.....아가야....미안해, 정말.....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