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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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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BY 상실 2001-01-10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

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
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
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사랑에 더 열중하고
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
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엄마의 물건은 모두 정리했다고 생각했다. 지웅의 책상을 치워주다가 책꽂이의 공책들을 뒤적이던 지해는 낯선 글씨들로 채워진 공책을 발견하고는 처음에 지웅의 과외선생 것이려니 하고 덮어두려다 엄마의 글씨체가 생각나서 다시 펼쳐 보았다. 엄마의 글씨체라고 해봤자 몇 번 본적도 없었다. 엄마의 글씨체라고 확신한 것은 지웅의 과외선생은 이제 겨우 스무 살짜리 대학생인데 공책에 적힌 글씨체는 스무 살 여학생의 글씨라고 보기에는 너무 어른스럽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일기장...우리 집의 사각지대인 지웅의 책꽂이 구석에 감춰져있던 그 일기장의 첫 장에는 어느 시인의 시집에서 본 적이 있던 시가 있었다. 엄마도 여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면 일기장 맨 앞장에 적어 놓은 시는 당시의 엄마의 마음이었을까...지해는 갑자기 엄마의
실체와 마주한 느낌이었다. 중학교때 까지는 곧잘 지해의 장래에 대해서 대화도 나누던 엄마였다. 그러나 지해가 고등학생이 되자 엄마는 지해에게 낯선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지해의 탓인지 엄마의 탓인지 생각해 본적도 없지만 그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하지만 엄마의 공책 첫 장에 적혀있는 시를 보자 지해의 가슴은 무거운 돌덩이가 묵직하게 놓여지는 것 같았다.
엄마는 이 시를 어디서 봤을까...엄마와 시...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엄마가 시집을 옆에 놓고 공책에다 옮겨 적었을 모습을 상상해 보았지만 그것은 더더욱 낯선 상상일 뿐이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그때도 알았더라면...알았더라면 엄마는 다르게 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