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병원인 집 까지는 20 분정도 거리이다.
난 점점 상태가 악화 돼다가 아빠 얼굴을 보면서 의식을 잃었었다.
나중에 아빠한테 들은 얘기가 경훈이 거의 울다시피 했었다고,
하루 결석하고 등교한 교실에선, 날 보는 여자아이들의 시선이 너무
따가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훈은 날 보더니,
"괜찮냐? 아직 그렇구나. 하루 더 쉬지 그랬니?" 하면서, 걱정반
반가움 반이 섞인 얼굴로 쉬는 시간마다 내 옆으로 왔었다.
아이들이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난 잽싸게 약속을 했다.
"이따가 나 좀 봐.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수업 끝나구."
경훈은 세상을 다 얻은 표정으로 자리로 갖고, 난 속으로 앙큼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야, 오늘 마지막 2시간 디게 지루하더라."
"너, 나 좋으니? "
"......몰랐냐? 나, 너 처음 봤을 때, 너 나보구 웃었잖아. 너처럼
이쁜애가 날 향해 웃어주는데, 내가 제정신이겠냐? 게다가 알고보
니 공부도 잘하더라.그 때 결심했어. 장미사는 내여자라구."
"그랬어? 진작 말을 하지...근데, 어떻하니? 너 같은 시골 출신은
싫은데. 그 대신 너, 1등해. 내가 다음 시험 때 몇개 틀릴께. 그럼
그저께 나 데려다 준거 그걸루 다 갚은거다?"
순간 경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음을 보면서, 또 후회하는 나
'어휴, 미사야, 너 왜그러니? 맘에두 없는 말을 해? 너두 경훈이
좋아하잖아.그냥 나두면 어때서?'
그 때 경훈의 입에서 나온 말.
"내가 시골 출신이어서 너 같은 박사 딸은 쳐다 봐서두 안된단 말
이지? 못된 기집애, 까불지마! 난 앞으로 실력으로 널 얼마든지
이길수 있어."
"어.. 화났나봐. 너 화나게 하려구 그랬던건 아닌데...어떻하면
너 화 풀어지겠니? 이렇게?"
하면서 벤치에 올라가서 그 아이의 이마에 쪽하고 뽀뽀를 해 주었다
"....니 진심이 뭐야? 너, 나 가지구 노니? 지금? 좋아. 지금
확실히 말해. 나야? 민규야? "
"유치해.둘다 아냐. 민규는 널 피하기 위한 가림판이었어."
"그럼 민규는 너에 대해 어떤지 생각해 봤어?"
"그딴걸 내가 왜 생각해? 난 너희 둘다 관심 없어."
"민규는 내 둘도 없는 친구야. 그 앤 나처럼 강하지 못해. 민규한
테까지 오늘 나한테처럼 굴면, 그 땐 내가 가만 안 있을꺼야."
"그래? 무섭네. 재밌겠다, 한경훈이가 어떻게 하나 두고 봐야지.
근데, 사실 나두 너 좋아해."
그말 한마디 남겨 놓고 난 막 뛰어서 그 자리를 피했다.
어린, 숙성되지 않은 사고로 내뱉은 한마디가 상대방아이의 가슴에
비수로 꽂힌 줄은, 몇 달이 지난 후 경훈의 전학으로 깨달아 알게
되었다.
민규조차도 경훈의 전학 소식을 몰랐다고 했다.선생님께 부탁해서
교실에서 인사도 없이 그 아인 그렇게 떠났고, 나와 민규에게 2통의
편지를 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받았다.
<장미사.
이쁜이름이고, 얼굴도 이쁘지만, 넌 그 모든걸 지닐 자격이 없는 아이
란걸, 깨달을 수 있게 해주고 싶었는데 갑자기 전학가게 돼서 유감이
다. 기다려라. 널 꼭 내 여자로 만들어서, 내 아래 무릎 꿇게 할 날이
있을꺼다. 한경훈.>
편지를 발기발기 찢으며 부르르 떨고 있을 때 민규가 다가 왔다.
"너한텐 뭐라구 썼니? 어, 벌써 찢었구나."
"니껀 뭐라구 써 있어? 이리줘봐, 보게."
"야... 안되는데...." 했지만 편지는 이미 내 손에 있었다.
<김민규
내 영원한 친구를 미사라는 여자아이 땜에 잃을 뻔했다.
좀더 강해지는 너를 보구 싶었는데..전학은 내가 원해서 가는거다.
미사를 잘 지켜줘라. 서울대 의대에 합격하면 미사를 찾으러 갈꺼다
난, 미사도 또 너도 잃고 싶지 않아서 너희 곁을 떠나는 거다.>
민규를 피해 돌아서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그렇게 고1과 고2를 보내면서, 나도 속으로 경훈을 만날 날을 기다리
며, 고 3 이 되었다.민규와는 그저 마음 맞는 여자 친구처럼. 그렇게
우린 늘 붙어 있었고...
오늘, 날 달래주고 싶어하는 민규하고 야자 시간에 땡땡이를 치고
학교뒤 대학교 캠퍼스에 앉아 있었다.
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민규가 까만 우산을 받혀주면서, 우산
으로 가리고 갑자기 키쓰를 했다.한 손으론 우산을 꼭 쥐고, 또 한
손으로 날 안았는데도, 어찌나 세게 안았던지 난 풀려날 수가 없었
다. 차츰 나도 그 아이가 하는대로 내 입과 혀를 맡겨두었다.
길고도 긴 입맞춤.
그 아인 어디서 배웠는지,내 혀를 놓아주질 않고 빨고 있었다.
민규의 등을 꼬집어서야 나를 놓아 주었다.
"아파서 죽을 뻔 했네. 너, 뭐야? 무슨 짓이야? 주제에 남자라구."
"...아프니? 어디 아, 해봐."
"내가 지금 너한테 아,하구 혀 보여줄거 같애? 너, 나한테 이럴수
있어?"
"..그냥. 감정 있어서 그런건 아니구..남자애들끼리 며칠 전에 설
문 조사 했었거든, 첫키쓰 언제 해 봤냐구. 근데, 다른 애들은
벌써 다 해 봤대. 그것두 고 1 때. 근데 나만 못해 봤잖니. 애들
이 너랑 그렇게 붙어 다니면서 키쓰두 여태 안 해봤냐구, 놀리길
래. 미안해. 물어보구 하려구 했는데, 물어보면 니가 못하게
할 거 같아서..."
난,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 어, 너, 웃음이 나오니? 그럼 화 안낼 꺼지?"
"그래 그래. 봐줬다.근데 너 어디서 배웠니? 그렇게 하는거래?
그렇게 아픈걸 사람들은 왜 달콤하다 그러지? 너, 잘못한거
아니니? 책 같은거 봐두 나처럼 아프대는 사람은 없었어. 다 달
콤하구 짜릿하다구 그러던데.... 우리 다시 해 볼래?"
"정말? 너, 안아프구 괜찮겠어?"
"미쳤냐? 너랑 또 하게? "
그 이튿날 아침에 혀를 봤더니ㅡ 파랗게 멍이 들어 있었다. 엄마
아빠한테 들킬까봐 말도 제대로 못하고 얼른 등교를 서둘렀다.
그런데,
영 밥맛없고, 재수없게 여겨지던 민규가 차츰 차츰 남자로 보이기
시작하는 날 느꼈고,참다 못한 난, 민규에게도 애길 했다.
"민규야, 우리 빨리 졸업했으면 좋겠다, 그치?"
"뭐하게?"
"응? 그거...너랑 맨날 맨날 키쓰하게. 넌, 그런 생각 안 들었었
니?"
"미사야, 정말이지? 오늘 한말 지킬꺼지? 난, 벌써부터 그랬는데
너, 화낼까봐 말 못했는데...미사야, 너 맘 변하면 안돼."
"알았어 알았어. 그치만 그거야 모르지.."
말하는 순간에 경훈의 편지 내용과 함께 그 아이의 무서운 눈이 떠
올랐다.
"민규야, 근데... 아니야."
"......너, 경훈이 생각...했니? "
".....그래. 너두 생각 났구나..."
"너두 경훈이 좋아 했었니?"
"우리반 애들 경훈이 안 좋아했던 애가 어디 있었니? 다 지."
".. 그랬니? 넌 .. 아닌 줄 알았는데. 맨날 경훈이하구 싸움만
했잖아."
"그거야...뭐. 그 때 니 편지에 나 데리러 온다구 경훈이가 그랬
잖아. 뭐, 꼭 기다리거나 믿는건 아니지만. 됐어, 됐어. 일단
대학 간다음에 그 때 돼 봐야 아는거지 뭐. 아마 걔 서울대
안 붙으면 안 나타날지도 몰라."
말은 그렇게 해 줬지만, 난 속으로 경훈이도 기다리고 싶었고,
규도 내 옆에 있어 주길 바라는 여우의 속성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다.
난 사립의 명문인 ㅇ 대에, 민규는 실력이 많이 딸려서 ㄷ 대에,
경훈은 소원대로 서울대에 합격했다.
우리들은 거의 3 년 만에 다시 만났다. 처음엔 약간 서먹서먹하긴
했지만, 경훈의 넉살로 분위기는 금새 예전의 고 1 때로 돌아 갔다
우린 맘껏 취했고, 다시 예전의 친구들로 돌아간듯 즐거웠다.
그동안의 경훈의 공부와 씨름한 얘기를 들으며, 진심으로 그 아이
의 합격을 축하해주고, 그 날은 모두 즐겁게 헤어졌다.
며칠 뒤에 아빠께서 경훈이를 집으로 부르셨다.
아빠는 고 1 때, 아픈 날 데리고 온 그 아이하고, 모종의 약속을
하셨었다고 했다. 나만 모르게.
"너, 참 무서운 아이다. 아빠랑 그런 약속을 했으면서, 나한텐
말 한마디 없었구.그럼 전학 간것두 우리 아빠랑 의논하구 간
거였니?"
저녁을 먹고 내 방으로 와서 난 그말 부터 물어봤다.
"글쎄... 나중에 말해줄께."
"뭐 대단한 비밀이라구, 지금 말하면 어때서.."
아이는 알수 없는 힘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봤다. 저 아이의 저 눈빛
을 좋아했었는데...근데, 저런 빛이 아니었는데...
그 아이가 나를 내 침대로 몰고 갔다.아래층엔 가족들도 다 있는데
내 방이기 때문에, 내 집이기 때문에 난 아무런 비명도 지르지 못하
고,내 순결을 뺏기고, 짓 밟혔다는 생각으로 그 아이의 얼굴 밑에서
그 아이의 눈빛을 외면했다.
이렇게는 아닌데, 이러지 않아도, 난 너에게 갈 수도 있는데,
서로가 원할 때, 아니 그냥 먼저 말하고 원했어도 네에게 줄수 있는
데,자꾸만 눈물이 흘러 내렸다.
"몰랐니? 널 찾으러 온다구 했잖아.널 무릎 꿇게 한다구 했잖아."
"그럴려구 오늘 우리 집에 온거니? 내가 좋아서, 아빠 초청에 온
게 아니구, 나 짓밟으려구 온거니?"
"....그건 아니였어. 굳이 오늘을 생각했던건 아니였지만....
간다. 또 보자!"
끝내 미안하단 말은 없었다.
민규는 키쓰 한번 하구두 미안해서 어쩔줄을 몰라 했었는데...
우정도 무너지고, 사랑이라고 아껴두면서 어줍잖게 키웠던 내 여린
첫사랑의 감정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아래층에 들릴까봐
소리 죽여가며 밤새워 울었다.
'나쁜놈. 너 하구는 이젠 끝이야. 날 이런 식으로 대하는 널 내가
용서할 꺼 같애?'
"아빠가 경훈일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 잘 모르겠지만, 또 경훈이
하고 무슨 약속을 하셨는지 모르지만, 경훈인 고등학교 친구 일
뿐이예요.앞으로 내 허락 없이 경훈이 부르지 마세요!"
"녀석들, 경훈이가 가면서 다퉜다고 하더니만, 아직도 화가 안 풀리
셨구만, 우리 공주님은.."
아, 아무것도 아빠는 모르면서.
할아버지가 계셨으면, 아빠를 설득해서 내 얘기를 들어 주실텐데..
돌아가신 몇달 만에 그날 처음으로 할아버지 생각으로 또 울면서
하루를 보냈다.
입학식 날엔 언제나 매섭고, 강한 바람이, 한껏 치장을한 신입생의
옷속으로 파고들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즐겁고 기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