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살만하다고 외칠 땐,
사랑하는 사람과 한 우주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이듯이,
꽃이 사람을 웃게 만드는건, 그 꽃 자체가 아닌, 꽃을 준 사람의
마음이 전해졌을 때가 아닐까?
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보니,벌써 2 층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베란다로 나가 광장을 가로 질러 가고 있는 그를 내려다 보았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그의 큰 키가 내 눈에 박히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다시 볼수 없을 꺼란 생각을 하고 있는데,우뚝 걸음을 잠시 멈추
더니, 갑자기 뒤돌아 서서 현관쪽으로 뛰는 그를 보고, 내가 먼저
엘리베이터 1 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나를 발견한 놀란 그의 눈이 작아지기도
전에,
"얼른 타. 나, 베란다에서 너 가는거 보구 있는데 니가 다시 오는
거 같아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마자 그의 큰입이 내 입을 막아 버렸다.
그는 태풍이다.
'정태 호' 라고 부르기로한 태풍의 첫번째 해일이다.
"....키쓰하려구 다시 온거야?"
어색함을 들키기 싫어서 내 뱉은 말치곤, 너무 친숙하게 들리겠는걸
"그냥 가려니까, 배가 고파서 도저히 못가겠더라."
"넌, 왜 나만 보면 맨날 배 고프대?"
"나? 늘 굶고 다니니깐."
"그럼, 나 말구두 만나는 사람마다 다 밥 사달래겠네?"
"내가 거지냐? 아무나보구 밥 얻어먹게...집에 밥 있어?"
"나가자. 나 집에서 밥 거의 안 먹어.저녁엔 샤워하구 캔맥주 하나
마시면 끝이야."
나가서 먹고 싶은 날, 기어이 집으로 몰고 들어가서 손수 라면을 끓여
먹는 그를 쳐다 보면서,
단 한번도 원하거나, 생각하지도 않았던 말이 툭 튀어 나왔다.
"나, 너랑, 같이 살았음 좋겠다!"
입안 가득 물고 있던 라면을 씹지도 않고 꿀꺽 삼킨 후,수 초동안
일시정지 화면의 그를 쳐다 보아야했다.
그동안 나도 감정수습을 하고 있었다.
'미사, 쓸쓸하니? 외롭니? 아님 어느새 혼자 살기가 지겨워졌니?
누군지도 모르구 아무한테나 그런 말을 하다니...태풍은 정태가
아니라 바로 나로구나...'
"너같은 꾼도 그런 말 들으면 놀라니? 아니, 놀란척 하는거, 겠지."
"허!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꾼인걸. 역시 고수는 고수를 알아
본다니까......너....누구니?"
"너두 그딴거 알구 싶니? 알아야 되겠니? 글구, 내가 진심으로 너랑
같이 살구 싶어한다구 생각하니?"
"....장난...이라구 생각하진 않아. 물론 진심두 아닐꺼구...그러니
까, 내가 선택되었나 본데,난 너처럼 즉흥적이지가 않아서, 일단
생각을 해 봐야겠는걸. 혹시, 내가 널 버린 남자하고 닮았니?"
"유치하긴..그렇게 안 봤는데, 어려서 그런거니? 난,이미 지나간
모든거에,털끝만큼도 미련이 없는 사람이란거, 알아둬라. 그리구
앞으로 몇번 더 만날지 모르겠지만, 나, 찰나적이고, 충동적이고,
가끔 대책없는 말과 행동을 나도 모르게 저질르니깐, 그 때마다
오늘처럼 긴장하지 마라."
"뭘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해? 그냥 별종이구, 괴짜다, 그러면 딱 돼
겠네."
"짝 짝 짝! 정답! 꽃, 좋은데!"
"좋은데. 가 아니구 고맙다구 하는거야."
"그래, 고맙다. 이젠 가라."
"꽃, 고마운 보답은 안하나?"
"라면 먹었잖아. 우리집에서 밥 먹은 사람 너 밖에...읍."
두번째 키쓰. 어느새 그의 기습 키쓰가 싫지 않은 나, 팔을 벌려
그를 마주 안았다.
"야! 김치 냄새 나서 혼났네.양치두 안하구 키쓰하니?"
"허허허! 한번씩 내 뱉는 발언,정말 죽여주는군.좋았어, 담엔 명심
하구 양치질하구 다닐께.바쁘면 껌이라두 씹을께, 됐어?"
"잘 가,"
잘가, 태풍. 에서,태풍은 속으로만 했다. 본인이 태풍인줄 알면 또
어떤 바람인가를 몰고 달려 올테니까.
그를 보낸 빈 집에 혼자 남아서 맥주를 마시며, 내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리며 여러개의 맥주 캔을 계속 비워냈다.
난, 지나간 것들에 털끝만큼도 미련이 없다고....
기막힌 거짓말을 했군.
과거를 털끝만큼도 잊거나, 털어내지 못하고 고스란히 이 작은
가슴속에 껴안고, 울었다, 웃었다를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는게,
나,이면서...
사람들은,현재에 있으면서, 지금의 나만을 알면 될것을, 과거의
내가 왜 궁금할까?
정태, 그도 언젠가 내가 궁금한 날에는 물어 오겠지? 오늘처럼,
너, 누구니? 라고.
내 26 년의 다양했던 삶을 어떻게 다 말할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