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학기가 끝나고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았을 무렵 따뜻한 아랫목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뭐하니? 동아리방에도 잘 나오지 않고......
오늘 좀 나올래? 선배들을 모시고 우리 신입생들이 마련하는 행사를 준비 중인데, 니가 좀 도와줬으면 싶어서..... 그게 어려우면 그냥 얼굴이나 한번 보자."
1학년 초기부터 같은 단과계열이라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온 준석이었다.
"나,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날씨도 춥고. 나중에 내가 전화할께 그때 만나면 안될까?"
"에~이. 그러지 말고 나와라. 내가 차한잔 사줄께. 엉?"
어울리지 않은 애교까지 부리는 모습에 알았다는 대답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난 그때 지독한 짝사랑에 빠져있었고 방학동안 좋아하는 과선배의 얼굴을 한동안 보지 못한다는 서운함에 어떻게 하면 적당한 핑계로 선배를 만날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었다.
집을 나서니 조금은 매서운 바람이 내 마음을 돌리려 하고 있었다.
집에 있으면 낮잠이나 잘 것이 뻔하고 다시 들어가기도 그렇고 해서 마침 정류장에 서 있는 버스를 바쁘게 올라탔다.
아마도 그 버스를 타지 않았다면 행사준비에 참가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와의 만남도 없었을런지도......난 이미 그 동아리에서 탈퇴자 명단에 들어있다는 친구의 말을 얼핏 듣기도 했으니까.
준비를 하고 있다는 강의실에 도착하니 제법 많은 동기들이 여기 저기무리를 지어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준석이 외에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은 터라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한쪽 구석에 서서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동기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난 누군가가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네주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 때 어디선가 반가움을 가장한 인사말이 들려왔다.
"야! 이게 누구야? 경영대의 마스코트 송우진 아니야! 얼른 와!"
농담을 좋아하는 영수였다.
"우진이가 마스코트라면 경영대의 수준을 알만 하군."
비웃음처럼 들릴 만도 했지만 모두들 하하거리며 웃고 말았고, 나도 덩달아 웃으며 우리를 웃긴 누군가를 찾기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과 함께 손을 내밀던 사람이었다.
진.정.희.
그의 이름 세글자가 머리 속에 그대로 각인이 되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