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줄기차게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와 문이 부서져라 두들기는 소리에 재이는 눈을 뜨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기전에 목욕실에서 나온 현수가 문을 열러 가는걸 본 재이는 어젯밤 술에 취한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기억이 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너! 이자식... ]
그녀가 미처 문가에 닿기전에 이미 들어온 재원이의 주먹에 현수가 휘청거리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 오빠! ]
그녀가 다시한번 주먹을 쥐는 오빠를 앞에서 막으며 말리려 하자 재원은 그녀 마저도 밀어내 버리곤 너무 화가나 조절이 안되는지 가쁜 숨을 몰아 내쉬고 있었다.
어젯밤 현수를 부축해 집에 들어올 때 동네에서 그녀와 그녀 가족들을 잘아는 슈퍼 아줌마가 유심히 바라보는것같아 찜찜했었는데 드디어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현수의 찢어진 입의 상처가 마음 아팠지만 지금은 오빠를 먼저 진정시키고 볼일이었다.
[ 너, 이럴려구 독립 독립 했던거야? 남자나 집안에 끌어 들일려구... 도대체 너 속 썪이는데는 이제 질려 버렸어... ... 나쁜 놈, 어떻게 니가 ...내동생한테 이럴수가 있어? ]
재원의 화가 다시 현수에게로 돌아가자 그녀는 오해를 풀기 위해 다시 오빠의 팔을 잡았다.
[ 재원아!... 재이 나 주라 ]
너무도 갑작스런 말에 재이도 그녀의 오빠도 할말을 잃고 현수를 바라보았다.
그가 너무도 담담하게 친구를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얘기하자 그녀의 오빠는 얼굴이 굳어졌지만 재이는 가슴의 떨림을 들킬까봐 누구의 얼굴도 쳐다 볼수가 없었다.
[ 재이야, 미안하다. 이런식으로 청혼하게 돼서... ]
그녀는 숨이 막힐듯한 흥분에 오빠가 어깨를 힘없이 떨구고 분노와 슬픔이 깃든 표정으로 현수를 노려 보는 것도 현수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는것도 느끼지 못했다.
[ ...저녁에 다시 보자. 내가 연락할게 ]
힘없이 문을 나서는 오빠를 배웅할 생각도 못한채 그녀는 문이 닫히자 마자 현수의 품안으로 뛰어 들었다.
[ 고마워 오빠... 나... 잘할게 ]
[ 나랑 결혼하면 널 힘들게 할지도 몰라 ]
[ 괜찮아, 난 씩씩하니까 ]
[ 난 ... 아들이 있어 ]
[ 내가 엄마가 돼줄게 ]
[ 흐∼음, 정말 못 당하겠어]
[ 사랑해 ]
[...가봐야겠다. 휴... 오늘 저녁에 재원이 만나서 얘기 하려면 준비좀 해야 될꺼아냐 ]
[우리 오빠가 부담스러우면 내가 얘기할까? ]
[ 아니야, 내가 알아서 할게...재원이 한테서 사랑하는 동생을 뺏어 오는데 그정도는 감수해야지 ]
그는 재이를 향해 웃어 보이며 웃옷을 걸치고 곧바로 그녀의 집을 나섰다.
가게문도 일찍 닫고 오빠 집으로 온 그녀는 초조하게 집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열두시가 넘어가도록 전화도 없고 핸드폰도 안된다는 언니의 불평을 건성으로 들으며 아침의 험악했던 순간을 생각하며 오로지 현수가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먼저 오빠와 얘기했어야 한다는 후회가 밀려 올때쯤 되어서 초인종이 울려대자 그녀는 쇼파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현관문을 열자 거의 앞으로 고꾸라질뻔 하는 오빠를 언니가 일으켜 세우는걸 도우려 그녀도 얼른 오빠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순간 차갑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살기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자 민망해 한건 언니였다.
[ 어디서 이렇게 마신거야? ... 어..어..어? 정말 웬일이야? ]
술에 취해 가누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커다란 남자의 몸을 두여자도 감당 못하고
거실 바닥에 같이 쓰러지자 언니는 손바닥으로 오빠의 팔이며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잠시 숨이 차는지 대자로 뻗은 오빠가 헉헉대는 숨소리를 들으며 죄책감이 들어 그녀는 그 자리에 살며시 무릎을 꿇고 앉아 축 늘어진 오빠의 팔을 잡았다.
[ ... 오빠... ]
[ ...나쁜 기집애 ... 너란 애는... 왜 하필 현수야? ... 왜? ]
[ 미안해... 근데 날 좀 이해해줘 ... 그렇게 밖에 안되는걸 어떡해? ]
그녀가 잡고 있던 팔을 아까와는 다르게 힘없이 빼내 자신의 이마에 얹고는 한숨을 토해내는 오빠의 모습을 보다못해 고개를 돌리자 이제껏 보지 못했던 언니의 원망스런 눈길이 그녀를 가슴 아프게 했다.
그녀에게 불같이 화를 내던 오빠가 현수와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지만 마지못해 결혼을 승낙한 오빠는 그녀를 집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녀도 결혼전까지 친정식구들과 지내는것도 나을 듯 싶어 집을 내놓고 간단한 짐을 챙겨 오빠 집으로 들어왔지만 오빠의 냉담한 반응과 눈치를 보는 언니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그래도 곧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생각하면 행복한 표정을 감출수는 없었다.
간혹 책방에 걸려온 현수의 전화를 받고난후면 단골손님들이 놀려댈 정도로 그녀는 날아갈듯한 기분이었다.
걸리는게 있다면 이제 7살인 그의 아들이었다.
아이들이라면 죽고 못사는 그녀였지만 내일로 다가온 그의 아들과의 만남이 떨리고 부담스러운건 어쩔수 없었다.
현수와 그의 아들을 만나기로 한 백화점의 훼미리레스토랑앞에서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점심을 먹으면서 얼굴을 익힌다음 백화점안에 있는 놀이기구를 타러갈 예정이었다.
그녀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 몇미터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두사람이 눈에 들어오자 긴장했다.
[ 일찍 나왔어? ]
[ 아니...조금 ]
그녀는 시선을 돌려 그의 아들에게 미소 지어보였다.
[ 안녕....난 아빠 친구야 ]
그녀가 열심히 연습했던 인사말을 하고는 손을 내밀자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와 재빠르게 악수하고는 손을 뺐다.
또래에 비해선 키가 커보이는 아이는 현수를 닮기 보다는 엄마를 많이 닮은 얼굴인데다 아이답지 않은 차가운 눈빛에 그녀는 당황했다.
[ 들어가자 ]
[ 오빠, 나 영어로 말해야 되는거야? ]
그녀가 자리에 앉아 난감한 표정으로 말하자 그가 웃었다.
[ 괜찮아 가끔 어색한 단어를 쓰긴 하지만 한국말 잘해. 집에서 아이를 돌봐 주시던 아주머니가 한국사람이었거든 ]
[ 휴... 다행이다. ....근데 민우라고 했니, 우리 뭐 먹을까? ]
말없이 시선을 다른데 두고 있는 아이에게 그녀가 메뉴를 내밀자 묵묵히 들쳐보는 아이는 너무도 조숙해보여서 그녀는 신경이 쓰였다.
차라리 장난이 심하고 말이 많은 아이였으면 편했을걸 하는 생각이 스치자 그녀는 자신의 이기심에 부끄러워졌다.
[ 민우야 ! ... 이 누나랑 아빠 결혼할꺼야 ]
주문을 마치고 꺼낸 그의 말에 그녀가 놀라 먼저 아이 얼굴을 살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얘기를 꺼낼줄은 몰랐다.
아이는 놀라는듯하더니 곧 슬픈 표정이 되어버렸다.
[ 이 누나가 민우 엄마가 돼 줄꺼야 ]
[ 엄마는 죽었잖아 ]
아이 입에서 나온 슬픈 첫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