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떠나기(3)
고시원에 가까이 가자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늦은 시간
학원을 돌다 집에 돌아오는 고3의 아이를 봐주느라 그랬지만, 나
는 화를 삭이느라 더 늦어졌다. 태희와 헤어진 후 편의점에서 간
단하게 라면으로 때우고 그 아이의 집으로 달려가 조는 애를 깨
워가며 씨름하고 다시 돌아와 학습자료를 정리하고 예상문제를
뽑고 할 일이 언제나 태산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날밤 태진
을 만나야 했다.
참아보려고 노력했지만, 한계치였다.
" 이 밤에 웬일이야?"
"한가지 물어 볼 게 있어서."
"그게 뭔데?"
"나를 사랑해?"
"그게 무슨 소리야? 왜 그래? 나 집중해서 해야돼, 알잖아?"
"사랑하느냐고?"
"정연아..."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해 봐, 나를 사랑해?"
"우리 이런 사랑타령 할 때가 아니잖아. 왜 그러니?"
그는 내 의도를 잘 못 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안기고 싶어서
찾아 간 것이 아니었다. 그럼, 사랑하지..라는 그 한마디를 위
로 삼아 그가 마지막 시험을 치르는 그날까지라도 버티고 싶었
기 때문이었다.
"그래, 알았어. 내 눈을 보고 그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겠
지. 당신도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겠지."
"사랑하지 당연히. 말로 해야 아니?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조금
만 참고 기다리기로 했잖아."
"천 만원은 뭐야?"
"태희 만났니?"
"그래 당신 어머니 치료비 드리려고,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도 설마 그런 말을 믿고 그 어마어마한 돈을 만들려는 건 아
니었겠지?"
"그것 때문에 달려 온 거구나."
그제 서야 내 의도를 알았다는 듯이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
내 물었다.
"당신이 말해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태희를 알잖아, 그런 애야. 어머니는 이유 없이 자주 아프시다
고 하고 실제로 병원에서는 모든 게 신경성이라고만 하니까...
그럴 수 있잖아. 니가 이해해라."
"뭘? 뭘 이해해야하는 데?"
"자꾸 이런 식으로 너까지 나를 피곤하게 하면 공부를 어떻게 하
란 말이니?"
그는 오히려 화를 참는 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그럼 그 돈 얘긴 못 들은 걸로 해도 된다는 말이지?"
대답 대신 갑자기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 좀 내버려 둬 주면 안되겠니? 공부를 해야 하잖아! 너까지
왜이래?"
"당신을 미치게 하는 게 나야? 왜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건데? 당
신 식구들이 괴롭히는 거야. 똑바로 알아야지. 내가 아니야! 나
도 피해자야! 알겠어?"
"그래! 그래! 그래서 어쩌라구 나더러?"
그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적어도 나한테 그런 소리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어야지."
"니가 남이니?"
"그래? 내가 남이 아니야? 그래?"
나는 하하 웃으며 돌아서서 와버렸다. 내가 남이 아니라구....
우리는 언제나 남남이 될 수 있는 사이였다. 나는 어쩔 것인가
밤새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사랑한다는 일에 대한 대가가 결국 이런 것인가. 이런 고통을 안
고도 나는 내 미래를 저당 잡혀야 하는 건가. 그가 혹시 시험에
붙어 바라던 대로된다고 해도, 아마 우리는 끝없이 싸우고 끝없
이 갈등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는 내게 빚이 있다고 여길 것이
고 나는 그걸 돌려 받으려 애쓰게 될지도 몰랐다. 사랑으로 시작
한 우리 관계가 그렇게 곤두박질쳐, 결국 서로의 발목을 잡아 결
혼이라는 둘레에 묶인다고 해도 우리는 평생 서로를 짐스러워 할
지도 몰랐다.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은 그가 내 짐으로, 그리고 훗날에는 내가 그의 짐으로 그렇
게 남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랑했으므로, 나는 떠나기 전에
그에게 이제 최선을 다해 주고 싶었다. 돌아서서 한 점 후회 없
이 다 털어 주고 내 갈 길을 떠나가야겠다고, 그 밤 그렇게 생각
했다. 유치하고 엉뚱한 발상일지라도 아직도 나는 그를 사랑하므
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낡은 수첩이 해마다 새로 쌓이
는 무게만큼이라도 그는 내게 사랑으로 남을 터였다. 그에게 기
댄 내 남은 삶을 기대하지 않기로 했고, 나 혼자 스스로 만들어
가야한다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윤수의 집에는, 점을 점을 보러 온 사람들이 몇 팀 눙에 띄었
다. 그러나 윤수는 보이지를 않았다.
손님과 마주 앉아 있던 윤수의 아버지는 나를 보자 눈인사를 하
며 작은 방을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 손짓을 무시하고 점보는 방 앞에 앉아있었다. 의아한 눈
길로 나를 바라보던 그는, 앞의 손님들이 가고 나자, 무슨 일이
냐고 물어왔다.
"윤수는요?"
"선생님이 두시 쯤 오시는 줄 알고 큰오빠네 심부름 보냈는데,
오라고 전화 넣을까요?"
"아니요. 저, 윤수 아버님께 여쭤 볼게 있어서요."
"점 보시게요?"
놀란 눈으로 그는 내게 물었다.
"네."
"선생님이 무슨?"
"어떤 분이 자주 시름시름 앓는다는 데, 신병이라면서 굿을 해
야 한다 네요. 한 천 만원 든다든데 정말 인가 해서요."
"누가요?"
나는 머뭇거리며 대답하기를 꺼렸다.
"그냥, 생년월일만 넣고 말씀 드리면 안되나요?"
"그러 지요.."
일어서서 촛불을 켜고, 향을 하나 피운 뒤 그는 부채를 펼쳤다.
"시어머니 되실 분이구나. 어허, 조상 중에 처녀로 돌아가신 분
이 두 분이나 되는구먼요.이러니 ??... 시어머니 어깨 위에 하
나 머리 위에 하나 눌러 있구 만요."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갑자기 억양이나 말투
가 이상해 진것도 웃겼지만, 이 세상에 객사하거나 처녀로 죽은
귀신이 없는 집안이 도대체 어디 있겠는가. 그 정도면 나도 점
을 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 어금니가 깨물어졌다.
"그래서요?"
"그러니까 이 귀신들을 ?는 굿을 하겠다는 건데, 보통 장군신
가지고는 어림 없겠구만요.
굿판이 커도 보통 큰굿이 아니면 어림 없구만요. 그리고 이 집
대주, 장남 앞길을 막고 있구만요. 조상들을 위하지 않아서 다
들 노해버렸네. 어허, 큰일이구만."
"그럼 굿을 하면 장남이 고시에라도 붙나요?"
"선생님, 잘 들으시오. 장차 판검사 사모님 소리 듣고 떵떵거리
고 살텐데, 이 정도 해 드려야지. 천 만원... 내 선생님한테는
그렇게 받을 수 없고, 그래도 무당도 여럿 불러서 한 사나흘 해
야 되는데, 음석이랑 모두 다 할려면 적어도 육백은 있어야 하겠
구 만요."
판검사 사모님? 나는 정말 웃고 싶었지만, 웃지는 않았다.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을 터였다.
나는 속마음을 숨긴 채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좋아요. 준비를 해 주세요. 본인도 있어야 하나요?"
"그 집서 해야지요."
"지방인데..그래도 괜찮겠어요?"
"차비가 좀 더 추가 될 테고, 거기서 아는 사람 불러다 쓰지요."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해 주세요. 날짜를 정해서 알려주세요."
"그러지요."
나는 돈 이만 원을 꺼내서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바라보았다.
"윤수는 이제 오라고 하시지요?"
"그럴까요?"
공책 한 권을 닳도록 글자 연습을 이쁘게 한 윤수의 머리를 쓰다
듬어 주고, 나는 먹고 가라는 점심을 한사코 마다하고 그 집을
나왔다.
태희에게 전화를 걸어, 굿 문제를 얘기했다. 자신이 아는 곳에
서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약하게 항의했지만 어차피 돈은 내 주
머니에서 나가는 것이라서 그런지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
었다.
"언니두 같이 올꺼예요?"
"전 못 가요. 아시잖아요. 일 때문에라도 갈 수 없어요."
"하여간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
나는 곧바로 은행으로 달려갔다. 적어도 그가 시험에 붙고 연수
원을 졸업할 때까지는, 적어도 그때까지는 악착같이 모아야 한다
고 생각해서 절대로 열지 않았던 통장이었다. 나는 그걸 깨서 압
구정동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