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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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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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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둥지 속의 작은 새


BY 로미 2000-10-24


빈 둥지 속의 작은 새.


그의 어머니는 한 동안 입원해야 할 것이라고 돌아온 그는 내게

전했다.

"집어치우고 취직해야 할까봐,,"

돈이 필요할 때면 부르는 그의 십팔번이었다. 뒤이어 내가 해야

할 대답도 언제나 마찬가지 였다.

-왜 그래, 힘내.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 우리 기운내자,,

그러면서 나는 또다시 얼마간의 돈을 내밀어야 맞는 순서였다.

그러면 그는 너의 성의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받아 쥐고

돈을 부치러 나가야 하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왠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묵묵히 뒤돌아 서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왜 아무 말이 없는 거니?"

그는 등뒤에서 나를 안으며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태진씨, 나는..."

"정연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가 그를 아는 만큼, 그도 나를 알았다. 그는 익숙하게 내 브라우

스 단추를 벗겨 내고 거칠게 나를 안으려 들었다. 그는 그런 식

이었다.

"나, 가봐야 돼. 시간 약속 늦으면 안 되는 거 알지?"

그러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헝크러진 머리를 다시 빗으며 누워서 담배를 물고 있는 그를 내

려다 봤다.

저 사람을 왜 사랑하는 걸까...아직도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 이

유는 뭘까...조금씩 그에게 지쳐 가면서 그가 내게 원하는 건 도

대체 뭘까 그런 생각을 했다.

"문 잠그고 가, 있다 고시원에 들를게."

"조심하고, 잘 다녀와..."

다시 전세를 회복했다고 믿은 듯한 그는 누운 채로 말했다. 일나

가는 마누라를 등쳐먹고 사는 기둥서방 같은 표정이구나,,,그렇

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는 너무 오래 이렇게 살고 있는 거였다. 나는 아내도 아니면

서, 아내였고, 며느리도 아니면서 그 집의 며느리였다. 그래도

언제나 그의 어머니는, 내 아들이 판검사가 돼 봐라,,너 같은 애

가 어떻게 우리 잘난 아들을, 감사 한 줄 알아야지..하면서, 오

히려 내 존재를 받아 들여 준 것을 고마워하라고 말했었다.

그런데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를 사랑해서라고, 나는 그

렇게 믿었다.


첫 번째 아이 집으로 가기 위해서 버스를 탔다. 무슨 중견기업

회장 네 첩인 그 아이의 엄마는 비서였다는 데 아이를 언젠가는

그 회장의 자녀로 인정받게 하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 선생님 차 한 대 뽑아요, 힘드시면 제가 도와 드릴까요?"

"아니요, 대중교통 이용하는게 더 나아요, 차 가지고 시내 다니

면 더 막히잖아요."

"그건 그래요, 하지만, 우리 집에 오는 선생님이 매일 걸어다니

신다는 게 조금 그렇잖아요..."

"네, 알겠어요."

머리는 누굴 닮아서인지 눈이 항상 저 멀리까지 열려있는 못난

제자를 끌어다 앉혀 놓고 애쓰는 내자신이 그날 따라 더욱 한심

하고 처량했다.

열을 가르치면 열 한 개를 까먹고 마는 그 희한한 머리를 가진

아이는 한 시간 내내 몸을 꼬고 있었다.

"수아야.."

"네에?"

"너 이렇게 하면 고등학교 못 들어가,,,알지?"

"엄마가 유학보내 준댔어요."

"그래, 그렇다면 영어공부는 조금 더 잘 해야 되지 않겠니?"

"가서 배우죠 뭐. 제 친구가 그러는 데요, 영어 못해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대요."

"그러니.."

"선생님, 저 겨울 방학 되면 엄마랑 스위스로 스키타러 갈껀데,

시간 조정해달라고 엄마가 그러셨어요."

"그래 알았어."

"선생님 스위스 가 보셨어요?"

"아니, 아직.."

"그럼 같이 가실래요?"

인형같이 눈을 깜박이며 말하는 그 아이에게 나는 쓴웃음을 지으

며 대답했다.

"수아는 정말 행복한 거 아니?"

배시시 웃으며 수아는 칭찬인걸로 알아듣고 있었다.


같은 서울 아래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다는 사실은 처음엔 나

를 혼란스럽게 했다.

버스로 10분 안 거리에도 다른 세상은 펼쳐지곤 했다. 내가 처

음 압구정동쪽에 일자리를 잡았을 때, 나는 내 자신이 초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거리를 지날 때에도 초라한 차림새가 신경쓰

였고, 마음으로 느끼는 빈부의 차이는 그 간격이 너무 넓었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자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의 개념을 마비시켰

었다. 그 거리에 서면 나도 커피 한잔에 육칠천원도 아까운 게

아닌 것만 같았고, 까짓 몇 억이란 소리가 절로 나왔었다. 그러

나 세월이 더 흐르다 보니, 나는 다시 황새를 ?는 뱁새신세인

나한테서 벗어나게 되었다. 편하게 입은 차림새도 신경쓰이지 않

았고, 그들의 그 화려하고 소비적인 생활도 그저 그런 것으로 다

가왔다. 돈이 많아서 좋지만, 그렇다고 모두 행복하지 않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나는 깨우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황새가 될 수 없었다. 아직은....


윤수네 집에는 윤수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려 있어 그 수상쩍은 공기가 흐르는 집안에 조용히 들어

서자 윤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 나왔다.

"안녕하세요!"

밝은 웃음을 담뿍 안기며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그애

는 내 주위를 맴돌았다.

"아버지는 안계시니?"

"네, 오늘 일 가셨어요."

"그럼 언제 오시는데?"

"낼 모레요."

"그럼 다른 어른들은?"

"큰오빠도 같이 가셨으니까 저녁에 새 언니가 오실 꺼예요. 작은

오빠는 학교 갔구요."

"그럼 너 혼자 있어?"

"네."

어린 아이 혼자 두고 아무도 없다니..

작은 공부상을 부지런히 펴고 있던 그애는 잠시 부엌으로 가더

니 사탕과 과일을 가져왔다.

"떡도 있는데,,어제 일 했거든요."

나는 그 음식에 어쩐지 손대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의 정성을 생

각해서 사탕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선생님은, 일주일에 두 번 올꺼야. 그 동안 윤수는 숙제 잘 해

놔야 한다는 거 알지?"

"네."

"그런데 어머니는 안계시니?"

"엄마는, 어디 가셨어요."

"어디?"

"도망갔어요."

"뭐?"

"잘 모르지만, 도망갔대요."

"어, 그래..."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지만 이 어린아이를 두고 엄마는 어디로

간 것일까..나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윤수, 글자는 다 아니?"

"네, 한글은 다 읽어요."

"산수는?"

"숫자도 100까지는 다 알아요. 더하기두 빼기도 할 수 있어요."

"유치원에는 왜 안갔니?"

"...."

"미안해. 선생님은 윤수를 잘 알아야 하니까 물어 본거야. 대답

하기 싫으면 안해도 돼."

"유치원 선생님이, 저를, 가르칠 수 없대요."

"왜?"

"동자신이 자꾸 와서, 방해를 해서, 선생님이 무섭다고,,,"

"뭐라고?"

"선생님도 도망갈꺼예요?"

눈물이 그렁해가지고 윤수는 물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

을 수가 없었지만 아이가 상처를 받은 게 분명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윤수야 이리와,,"

아이는 순순히 내 무릎에 앉았다.

"선생님은 윤수가 공부 잘하면 오래 같이 공부할꺼야.."

"고맙습니다."


이 작은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동자신 이라니?

돌아오는 길에 그 아이를 혼자 두고 오는 게 걸렸지만, 나는 다

음 집으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내내 그 작고 마른 아이, 초롱한 두 눈을 가진 아이가 왠

지 자꾸 마음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