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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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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 윤수와 만나다.


BY 로미 2000-10-24



그 아이, 윤수와 만나다.


"선생님, 저 소개할 학생이 하나 있어요."

시간이 다 되어 교재들을 챙겨 들고나서는 내게 현지 엄마는 웃

으며 말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지금은 이제 스케줄이 다 차서요..."

"아니요, 선생님. 정말 부탁 드려요. 어떻게 ?을 좀 내 주세

요. 일주일에 한 번 이라도 괜찮을 거예요. 아직 초등학교 입학

전인 아이니까 별로 선생님 수고롭지 않으실 테고, 그리고 어차

피 학교 못 갈 애거든요, 겸정고시 볼 테니까 시간은 여유 있잖

아요. 선생님께 꼭 부탁 드리고 싶어요."

"어디 불편한가요?"

"글쎄요, 불편하다고 할 수도 있고,,,선생님이 한 번 가 봐주시

겠다면 그때 말씀드릴께요."

"네, 시간 조정을 좀 해보고요. 그럼.."

그 때까지 초조한 듯 내 뒤에 서 있던 현지가 이 때다 하고 인사

를 건네 왔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 현지, 하다가 막히는 거 있음 선생님 핸드폰이나 메일로

보내 알겠지?"

"네에.."

그렇게 짧은 순간도 아깝다는 듯 그 애는 고개를 까닥 하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렇게 파삭하니 여유 없는 아이라니. 어

린애가 무엇 때문에 저렇게 사는 걸까...가끔 나는 그 애의 머

리 속이 궁금했다. 하지만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미소를

띤 얼굴로 저렇게 열심히 해서 기특하다고 그 애의 엄마에게 내

키지 않는 칭찬을 하고 돌아섰다.

그녀는 돌아서는 내 뒤통수에다 대고 한 번 더 부탁을 했다.

"선생님 꼭 좀 시간 만들어 보세요."

"네에..."


항상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는 아이를 그래도 못 믿어서 인지 돈

을 퍼 부어가면서 나를 채용해 쓰는 현지 엄마를 딱 부러지게 거

절할 힘이 내게는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르치는 수고로움에 비교할 바 아니게 큰돈이 내게 들어오기 때

문이었다. 이 부자 촌, 압구정동 일대에서 과외교사로 버텨 나가

자면 엄마들의 비위를 잘 맞춰야만했다. 실력도 있어야 했지만,

소개로 이어지는 그 끈을 놓치지 않으려면, 그래야 했다. 나도

나대로 힘이 든다지만, 하는 일에 비해 보수가 넘치게 많은 직업

이다 보니 쉽게 놓칠 수는 없었다.


갤러리아 백화점 사거리에 서서 나는 다음 시간표를 확인했다.

점심 먹을 시간이 한 30분 가량 여유가 있었다. 압구정동에는 별

로 어울리지 않는 싸구려 분식집 구석에서 김밥을 씹으며, 나는

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난한 고시생을 애인으로 둔덕에 나는 언제나 많은 수입을 벌어

들여도 가난해야만했다. 언젠가 비상할 날을 꿈꾸며 고시에 매달

리는 그와 그의 가난까지도 내 몫으로 짊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왜 전화를 안 받아?"

오랜 신호음 끝에 그가 전화를 받자 나는 그에게 항의하듯 물었

다.

"지금 집에 가는 중이야.."

그는 피곤한 듯 말했다.

"아니 왜?"

"엄마가 입원하셨대."

"또?"

"또 라니? 왜 그렇게 말하니?"

"미안해. 이번에는 어디가 편찮으시대?"

"몰라. 신경성 당뇨라지 아마,,"

"언제 올 꺼야?"

"가봐서...."

"잘 다녀와..."


나는 핸드폰을 탁 소리나게 접어버렸다. 이즈음 나는 그가 짊어

진 삶의 무게가 서서히 지겨워져갔다. 그의 불투명한 미래와 밑

빠진 독 같은 그 가난을 나눠야 한다는 게 지겨운 건지도 몰랐지

만, 아무튼 그랬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놓아 버릴 수 없는 것

은 단순한 세월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목

소리만 들어도 감미로울 때가 많았고, 그의 사랑에 감질나고 목

말랐다. 그가 영원히 판검사가 못된다고 해도, 뼈가 가루가 되

는 날이 오더라도, 그를 위해서 뒷바라지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했

었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씩 그도 눈치

를 챌 만큼 그의 가족이 짜증스러워졌다. 툭하면 여기 저기 아프

다며 입원하는 그의 어머니는 병명조차 없이 언제나 그 상태였

고, 오빠 때문에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우기며 가난한

자신의 삶을 언제나 보상해주기 바라는 그의 여동생과 그 남편

이 그랬다. 그 뒷치닥거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다. 판검사 사모님

이 되는 건데, 이 정도야... 라며 그 식구들은 언제나 당당했

다. 비굴한 것 보다 보기 나아도 나는 그들이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집에서는 그와 헤어질 것을 바랬다.

평범하기는 하지만 별 불편 없이 자란 내게 그런 삶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엄마나 아버지는 반대를 했다. 판검사가 된다면, 그것

이 유일하게 내가 가진 방패였다. 그러나 그날이 언제가 될지.

그러다가 너만 시들고 만다고,,,엄마는 걱정하셨지만, 완강히 반

대를 하고 나서지는 못하는 건, 언제나 뒤에서 받쳐주는 권력

의 끄나풀조차 없어 사업이 제대로 안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혹시나 하는 기대 탓이었다.


나는 다시 교재를 챙겨 들고 경빈이네 집으로 향했다. 나쁜 소식

은 그 곳에서도 자리하고 있었다.

"비자가 나왔어요 선생님. 그 동안 수고 하셨어요. 오늘은, 차

나 한잔하고 가세요."

"경빈이는 요?"

"친구들 만난다고 나갔어요. 이제 곧 떠날텐데 조금 쉬게 하려고

요. 그 동안 너무 수고 하셨어요."

"그럼 인사도 못하고 헤어지네요, 경빈이 하고는 요."

"그러게요."

아무리 돈으로 맺은 인연이라도 선생은 선생인데, 씁쓸하기 그지

없었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랬다. 경빈의 어머니가 내미는 돈 봉

투를 받아 챙겨 넣고 나서며, 나는 다시 현지네로 전화를 해야

했다.

그의 어머니가 입원했다면 어차피 돈이 들어가야 할텐데, 큰 자

리 하나가 다시 비어 버린 셈이었다. 그렇다면 아까 현지 엄마

가 내게 내민 자리를 시큰둥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

린아이라면 굳이 내가 아니라도 될 테지만. 나는 목소리를 가다

듬고 현지네 집으로 전화를 했다.

"현지 어머니세요? 저 김정연이예요. 네, 그 자리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전화번호 좀 주시겠어요? 어딘 데요? 청담동요?

아, 사당동이요? 네? 예..그러지요.."

웬일인지 현지 엄마는 자신이 같이 가야 한다고 했다. 소개를 받

으면 일반적으로 혼자 찾아가곤 했었는데 이례적이었지만 그러자

고 약속을 한 뒤 나는 다음 집으로 향했다.

졸음에 겨워하는 아이와 씨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왜 이러고 사나,,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나이가 벌써 서른 하

나, 이제 이렇게 사는 게 피곤해져왔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모

든 일에서 피곤함을 빨리 느끼게 되는 건지도 몰랐다.



다음 날 아침, 가는 비가 뿌리고 있었다. 우산을 펴기도 안 펴기

도 애매한 비였다. 나는 비를 맞는 쪽을 택하고 사당동으로 향했

다.

전철역에서 현지 엄마와 만나서 새로 맡게 될 아이가 있다는 곳

으로 찾아갔다.

현지 엄마가 이런 곳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산동

네 가까운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과외를?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선생님, 제가 어려운 일 있을 때 항상 도움을 주시는 분이 세

요."

"네..."

"그 분 따님인데, 아무나 부탁 할 수도 없는 처지라서,,"

"무슨 말씀이세요?"

"저어기..선생님은 기독교는 아니시지요?"

"전 종교 없어요."

"그러니까 편견 없이 받아 들여 주셨으면 해요."

"무슨 말씀이신지..."

"가 보면 아실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 꼭 좀 봐주세요."

무슨 말인지, 나는 그 아이가 장애인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래

서 그렇게 어렵게 말을 꺼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문제 될 것도 없지 않은가, 장애인도 같은 사람일뿐인

데...하지만, 그 집 앞에 다 이르러서야 나는 문제가 좀 다르다

는 걸 알았다.

"여기는..."

"네에, 저기, 그 아이는 이 집 딸아이예요."

그 집은, 점집이었다. 집 앞에는 마치 절처럼 표시가 되어

있었지만 집안으로 들어서자 울긋불긋한 장식이며 향냄새가 진동

하고 있었다. 스산하고 이상스런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내

색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 아이의 부모가 무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제때 내 보수만 챙겨 준다면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별 별 집을 다 다녀봤어도, 이런 경우는 처음 이었다. 조금 어색

했지만, 아이는 소박한 웃음을 수줍게 지어 보여서 나는 마음을

풀었다. 부모의 직업 때문에 아이가 학교조차 갈 수 없다니, 그

게 좀 이상했지만 아이들이, 그리고 그 부모들의 편견 때문에 왕

따가 된 건 아닐까 지레 짐작 했다. 어쨌든 아이는 다소곳하고

예뻤고, 총명해 보였다.


"아이고 선상님, 이 아이 잘 부탁드립니다."

스님처럼 승복을 입고 목에 염주를 두르고 있는 그 아이의 아버

지는 틀림없는 어디선가 본 듯한 박수 무당의 분위기였다.

가늘게 찢어진 두 눈, 얇은 입술, 어딘가 중성의 이미지가 느껴

지는 그 수상스런 분위기. 하지만 현지 엄마는 대단한 신통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추켜세우기 바빴다. 자신의 남편 사업에 절대적

인 도움을 주는 분이며, 하라는 대로해서 손해본 적이 없다고

거의 광신도 같은 분위기로 열변을 토했다.

그 사이 그 아이는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맑은 눈을 가진 아이

었다. 현지엄마의 수다를 끊고 나는 그 아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니?"

"윤수요."

"그래 윤수, 선생님하고 잘 해보자."

"예..."

내가 하기로 결정하자 현지 엄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행이

라고 말했다.

윤수의 아버지는 고맙다며, 꼭 제때 보수를 챙겨 주겠노라며,

몇 번이나 다짐하듯 말했다. 어쩐지 미덥지는 않았지만, 나는 고

맙다는 말을 해야 했다.



돌아오는 길목에서 현지 엄마는 넌지시 나에게 다시 말했다.

"선생님, 저를 봐서라도 좀 오래 봐주세요."

"제가 드릴 말씀이지요 그건,,"

"저기,,"

"네?"

"아니 예요, 차차 말씀 드리지요. 아시게 될 테니까요."

"제가 알아야 할 것이 있나요?"

"아니예요, 저도 실은 잘 몰라요..."

수상쩍은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나는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오히

려 돈주고 부린다고 제 마음대로 하려 드는 엄마들보다는 선생님

이라고 깍듯이 모시는 윤수 아빠 같은 사람이 더 그리웠을지도

모른다. 선생이라는 이름만 달았지 나는 그녀들의 아이를 감시하

는 첨병일 뿐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