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그냥 스쳐지나가는 민석이에게 차마 말을 걸 수가 없어서 그저 바라만 보았다. 이미 사려는 걸 생각하고 왔는지 망설임도 없이 테잎 하나를 들고 나에게로 오고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하고 나도 모르게 몹시 불안해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민석이는 아무말도 없이 내 앞에 돈만 놓고는 그냥 나가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민석이의 뒷모습을 보았는데, 체크남방에 청바지 그리고, 한쪽어깨에는 가방을 매고 있었고, 머리는 예전 그대로 빛이 나고 있었다.
'나를 모르는 걸까? 아는체를 안하는걸 보면 나를 못알아 보나봐.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볼 걸 그랬나? 연락처라도 받아놓을걸......이 바보'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민석이를 아주 잠깐 보게 된 난 다시 한번 놓쳐버린 것에 후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나의 후회가 행복으로 바뀌었다. 그날 이후로 민석이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가게에 들러 테잎을 사가는 것이었다. 물론 아무말도 없었고, 그저 테잎만 사갈 뿐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아무말도 걸지 못하고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채 뒷모습만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일요일......친구가 놀러와서 한창 수다를 떨고 있는데 문 여는 소리가 났고, 거기에는 민석이가 서 있었다.
오늘도 아무 망설임 없이 테잎하나를 들고 계산을 하고는 나가버렸다. 갑자기 민석이를 따라가고 싶었다.
"선주야. 가게 잠깐만 봐줘. 금방 올께"
"지영아. 어디가는 거야?"
난 문을 열고 민석이를 따라갔다. 옷 입은 걸 보니 검정고시를 봐서 대학에 간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난 민석이를 먼저 아는체 하기가 싫었는 모양이다.
일요일이어서 그러지 사람들이 꽤 많았고, 그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민석이를 따라가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아! 아가씨 발을 밟았잖아요!"
"어머!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난 인사만 하고는 다시 민석이를 봤지만 그 사이 민석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져 버린것이다. 하긴 따라가서도 말 한마디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며칠후면 민석이가 올 꺼라는 걸 알기에 난 쉽게 뒤돌아서 갈 수 있었다. 며칠후면......
9시가 조금 넘어서야 집을 나서 출근을 하였다.
집근처에 공사하는 곳이 있어서 그곳을 지날때면 언제나 먼지가 많았고, 기관지가 약한 난 언제나 입을 막고 지나가야 했다. 오늘도 그 곳을 막 지나려는데 귀에 익은 이름이 들렸다.
"민석아! 뭐해 빨리 움직이지 않고!"
"네! 빨리 올라 갈께요"
민석이란 이름에 그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그 민석이었다.잠시동안 놀랐지만 난 민석이가 학비를 버느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우리집 근처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게 너무 좋았다. 이젠 출근하는 길에서도 매일 민석이를 볼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가게에도 오지 않았고, 물론 공사장에서도 민석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을 푹 놓고 있었는데 또 다시 민석이를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민석이를 꼭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에 공사장을 찾아갔다. 한참을 공사장 밖에서 서성이다가 겨우 들어가 민석이에 대해 물어보았다.
"저......민석이를 찾아왔는데요......"
"민석이?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 민석이 일주일전에 사고 나서 지금 병원에 있어"
"네? 병원요? 어느 병원요? 많이 다쳤나요?"
"아마 의식이 아직도 없다지...돌봐줄 가족도 없이 혼자 있다는데...쯧쯧"
"가족도 없어요? 혹시 집주소 알 수 있을까요?"
그날이었다. 내가 민석이를 마지막 본 날 바로 그날 사고를 당한 것이다.
택시를 타고 병원을 가면서 내내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으로 닦아도 계속 흘러 내리는 눈물이었다.
제발 많이 다치지는 말아야 할텐데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았다.
608호 정민석......
문 손잡이를 잡고 한참을 서 있었다.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손잡이를 잡고 돌리고는 문을 열었다. 한 남자가 머리에는 붕대를 감고 다리 하나에는 깁스를 한 채 누워 있었다. 잠을 자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의식이 없어서 계속 누워만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침대 가까이로 가 민석이의 얼굴을 보았다. 처음으로 민석이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긴 속눈썹과 오똑한 코, 꼭 다문 입술......
민석이는 그렇게 잠을 자듯 내 앞에 누워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보호자세요? 그동안 보호자가 없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환자상태는 담당의사선생님한테 직접 들으시면 됩니다."
난 의사선생님을 찾아갔다. 일주일동안 의식이 없다면 분명 문제가 생긴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정민석씨 보호자 되십니까?" "네......"
"지금으로서는 정확한 상태를 말씀드리기가 그렇지만 제 생각으로는 기억상실증이 생길 것 같군요. 의식은 곧 찾겠지만 어디까지 기억을 할 수 있을 지는 저희로서도 아직 판단 할 수가 없겠습니다."
"기억...상실증이요? 다른데는 이상이 없나요?"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군요"
"네......알겠습니다"
기억상실증이란 말에 난 무척이나 놀랐다. 그럼 나를 기억못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