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스물 여덟]... 눈물
딩동~딩동~
세희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퇴근시간은 아닌데, 하는 생각
을하며 우르르 뛰어오는 애들과 함께 현관으로 향했다. 세희는 문을
열어본 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폴짝폴짝 뛰며 더 좋아하는 아이들.
"엄마. 너무 예쁘다. 그지?"
"와~~~~ 엄마. 예쁘다."
"그래. 예쁘다."
온 집안 가득하게 장미의 향이 가득했다. 얼어붙은 마음에 따뜻한
훈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거실 가운데 옮겨놓고. 그 앞에 무릎을 곤두
세워 끓어 안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엄마. 여기 편지 있다."
『이제는 건강과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김 승빈』
"엄마. 누구야? 누가 보낸 거야? 너무 예쁘다."
"응. 엄마 친구야."
메모를 보기 전부터 친구인 그가 보냈음을 알 수 있었다. 세희 주
변에 이렇게 세심하게 따뜻한 마을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희는 막연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고마운 그 친구가 보고 싶었다. 또르르 흐르는 눈물을 창밖으로 시
선을 옮겨놓아도 뿌연 망막 속에 뚜렷이 보이는 사람.
"엄마. 아빤가 봐."
이번엔 벽시계가 남편의 정확한 퇴근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혹시
모를 눈물 자욱을 감추며 손에 들고 있던 승빈의 카드를 주머니에 넣
었다. 꽃바구니에 시선을 두고 심호흡을 한번 해야 했다.
현관에 들어선 남편을 보는 순간 승빈의 선물이 문제가 되고 있다
는 것을 직감했다. 남편의 손에 들려있는 꽃다발. 같은 장미이다. 승
빈의 99송이에 비하면 작아 보아는 꽃다발이 남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세희를 긴장하게 만들고 있었다.
"고마워요."
"웬 꽃이야?"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는 장미 바구니가 무엇으로든 숨키고 가리기
에는 너무 커 보였다.
"응. 엄마 친구가 보낸 거야. 아빠 예쁘지?"
먼저 나서서 보고를 하는 아이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
말 없이 안방으로 사라지는 남편의 뒷모습에서 차가움이 베어 나오고
있었다. 세희를 얼어붙게 하는 그 어둠까지. 승빈의 선물을 작은 방으
로 옮겨 놓아야 했다. 그리고 남편이 사들고 온 꽃을 아끼던 크리스
탈 꽃병에 담았다.
세희가 긴장해 있는 것과는 달리 남편은 다행히 승빈의 선물을 별
다르게 문제 삼지 않는 듯 했다.
오래간만에 침실에서 만난 남편을 위해 세희는 봉사해야 했다. 세
희와 남편간의 성생활이 잘못되었다는 아니,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아이 둘을 낳고 나서야 서서히 알게 되었던 세희다.
세희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여지는 애무를 받아 본적이 없다. 어
느 순간 굴욕적으로 느껴진 섹스가 혐오스러웠고, 시작을 알리는 남
편의 키스가 있는 날이면 죽고 싶다는 생각 마저 들곤 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요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따라야 했다. 신혼시절 잠깐을
제외한 결혼 생활 내내.
여느 때처럼 남편의 일방적인 탐닉이 시작되었다. 키스. 세희는 이
미 각오했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고 주먹에 힘을 주었다. 당장에 라
도 힘껏 남편을 밀쳐내고 싶은 마음이 몸부림치지만 이성과 감성 모
두를 잠재우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세희의 입술에서 잠깐 머물던 남편이 역시 세희의 가슴을 찾았다.
아주 잠깐 유두를 깨워 놓고 끝났다. 이제 세희의 순서이다. 의레히
해오던 행위. 침대 위에 무릎꿇고 서있는 남편을 향해 침대 아래에서
세희는 무릎을 꿇어야 했다.
구역질이 날것같이 심한 굴욕감이 드는 날에도 세희의 머리채를 쥐
어 잡은 남편의 힘에 눌려야 했다. 봉사라고 생각하자. 맞지 않고 살
아 남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자. 다른 위안으로 스스로를 달래다
보면 시간이 흐르곤 했다. 일방적인 오랄 섹스. 남편이 절정에 다다를
쯤 세희의 몸은 남편의 배설을 받아 내는 도구에 불과했다.
늘 일을 치르고 나면 세희에게 밀려오는 수치심. 침대도 아닌 방바
닥에서 모로 누워 숨을 죽이고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남편이 늘
그래 왔듯이 잠옷을 곱게 입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수면을 취하는
것 같았다.
세희는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아니, 그저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고
있었다. 머리에 쏟아지는 물줄기가 발끝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뜨거운 물줄기가 흐느낌을 토해내고 있었다.
침실의 문고리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어둠 속에서 손에 잡힌 장식
장의 술을 들고, 작은방으로 향했다. 숨겨지듯이 놓여 있는 승빈의 선
물을 보자 비애감이 더욱 사무쳤다. 스위치를 다시 내려 불을 꺼야
했다. 장미꽃송이에 승빈의 눈이 있어. 자신의 모습을 훤하게 볼 것만
같았다. 결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
'왜 이 집에서는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일까? 내게 과연 희망이
있긴 있을까? 언제까지 이런 암흑 속을 헤매야 하는 것일까? 난 언제
까지 밤마다 울어야 할까?' 소리를 안으로 삼킨 울음이 목을 아프게
해왔다.
병으로 들이키는 알코올이 목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
동안 세희의 안주가 되어온 눈물. 오늘은 승빈의 선물이 마주 앉아
위로를 해주고 있었지만, 좀 전에 샤워를 끝낸 세희의 얼굴이 어느새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치지 않는 울음으로. 멈추어지지 않는
눈물로.
일순간 방안이 환해졌다.
당황한 세희가 술병을 치우고 얼굴을 매만졌다.
"그 남자가 그렇게 그리워? 눈물이 날 정도로?"
세희는 소름이 돋았다. 온 몸에. '저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거
지? 내가 취해서 잘못 들었나? 잘못 들은 거겠지?'
"김 승빈. 그 자식이 누구야? 지난번 동창회 때 함께 보낸 놈인가?
하룻사이에 그렇게 가까워진 놈이야? 아니 그 동안 계속 만나왔겠지.
날마다 전화도 하겠지? 그러니 집 주소까지 알고 있지. 오늘 집으로
돌아온 것까지 알고 있으니 낮에 만나기라도 한 건가?"
세희는 온 몸이 떨려왔다. '승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떻게
승빈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카드는 벌써 치웠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세희의 멱살을 움켜잡은 남편의 손에 힘이 가해지고, 바라보는 눈
이 세희를 집어삼킬 듯이 노려보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
었다. 아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