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스물 둘].... 침몰
늘 언제나 지옥 같은 밤을 겪을 때 세희는 「이것으로 이제 끝이겠
지. 이제 고통도 눈물도 없는 죽음의 강을 곧 건너가겠지.」 하는 생
각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
한 날도 유리창을 투과해 들어오는 아침을 만나야만 했다.
이렇게 차라리 죽었으면 했던 지난밤을 지나 세희가 맞은 아침은
유난히 맑았지만 종전과는 달랐다. 아주 많이 달라진 아침이었다.
고문실인 그 침실바닥에 구겨진 채 쓰러져 있는 세희를 흔들어 깨
운건 일하는 아줌마였다. 이런 식으로 아침을 맞는 날이면 늘 찾아
오는 아줌마였다. 남편이 불러 놓고 나간 아줌마.
파출부 아줌마는 드나들면서 처음에 세희가 몸이 많이 약해서 종종
자신을 부르는 경우로 알았었다. 그러다 한번 두 번 팔과 다리에 보
이는 푸른 멍자욱을 보며 맞고 사는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래도 아줌마가 오는 날은 언제나 세희의 몸이 침대에 뉘여져 있곤 했
었다. 이런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였을 것이다. 세희는 지난밤에 붙
여진 청테이프가 그대로 봉해져 있는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던 것이
다.
"아줌마! 아줌마! 정신 좀 차려봐요. 이러다 큰일나겠네. 아줌마!"
입에서 청테이프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아줌마가 흔들고
있었다. 희미했다. 흔들리는 몸에 통증이 조금씩 느껴지면서 의식 또한
아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힘겹게 힘겹게 세희가 눈꺼풀을 열었다.
"아줌마 정신이 좀 들어요? 세상에 어떻게 이지경이 되도록 맞고
살아요? 세상에.. 돈 있고 좋은 집에 산다고 다가 아니야. 세상에 이
를 어째요? 난 이렇게 맞고 사는지는 몰랐네.... 쯧쯧.. 세상에...
병원에 안가도 되겠어요? 내가 데리고 가줄께요. 움직일 수 있겠어
요?
파출부 아줌마가 더욱 흥분해서 말을 쏟아 놓고 있었다. 세희는 꼼
짝을 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굵은 눈
물만이 하염없이 흘렀다.
"아줌마..... 나 움직일 수가 없어요..... 살려주세요....."
"하이고 아줌마 이를 어째? 어쩌나? 내가 업을까요? 업어도 되나?
아니다. 아니다.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요."
아줌마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되돌아 왔다.
"아줌마. 조금만 참아요. 내 너무 다급해서 119에 전화했어요. 곧
올꺼예요. 괜찮아요? 어쩌나? 물좀 갖다 줄까요? 어떻게? 몸을 바로
?또?줄까요? 어쩌나 난 손도 못 데겠네.. 세상에 아저씨가 겉으론 점
잖아 보이 더만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세상에."
파출부 아줌마의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다시 귓가에서 멀어지면서
세희는 의식을 놓았다.
뿌옇게 밝아오는 형광등 빛이 보였다. 그리고 등갓에 [무궁화표]라
는 상호가 눈에 들어왔다. 2인용 병실인 듯 한데 옆 침대와 병실은
비어 있었다.
"아줌마 정신이 들어요?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말도 못해요. 가만
있어봐요. 내가 간호사 불러올께요."
물병을 들고 들어오던 아줌마가 바쁘게 돌아 나갔다가 간호사를 불
러왔다.
"환자분 좀 어떠세요? 보호자에게 연락을 해서 오시라 하시고요.
움직이실 수 있으세요? 사진을 좀 더 찍고, 검사를 해야 하는데."
"아니요. 못 움직이겠어요."
"그럼 의사선생님께 말씀드릴께요. 상의해 보세요."
보호자에게 빨리 연락해 달라는 말을 남기며 하얀 구두를 따각 거
리며 간호사가 나갔다.
"아줌마... 몇 시쯤 되었죠?"
"오후 3시 20분이네요. 아저씨가 언젠가 내게 주신 명함을 보고 내
가 아까 병원에 와서 바로 연락을 했는데 안 오시네요. 친정집 멀어
요? 누구 친정식구 없어요?"
세희는 결정을 하지 못했다. 남편에게 전화을 직접 해봐야 할지.
친정으로 해야 할지. 지금 남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죽을 만큼 싫었
다. 그렇다고 친정에 전화하면 애들을 데리고 있는 부모님이 얼마나
놀라실까 염려가 되었고 애들까지 알게 될 것이라는 걱정이 되었다.
아줌마가 안타까워 하며 돌아간 뒤. 보호자와 연락 어떻게 되었냐
며 간호사가 3번째로 다녀갈 때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나갔다.
세희는 시계를 보았다.
"여보세요..."
"저..... 진료중 이신가요?"
"아. 네 괜찮습니다. 무슨일 있으세요? 그렇지 않아도 댁에서 전화
를 안 받으시길레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승빈이 늦은 시간에 세희를 보내고 얼마나 걱정을 했던가. 걱정하
는 별다른 일이 없기를 얼마나 기원했던가. 안부가 궁금해 아침 10시
경 전화를 했는데 빈 울림만 이어질 뿐 받는이의 목소리가 없었다.
점심시간 다시 전화를 했지만 여전했다. 아직 친정집에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마음 한쪽에 남아 있는 불안함을 가지고 있
었는데 세희의 전화가 온 것이다.
세희의 기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래도 별일 아니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병원이라니... 입원이라니... 퇴근 시간까지는
아직 2시간이 남아있고, 대기실에 환자들이 몇 명 남아 있었다.
접수를 받고 있는 정간호사를 불렀다.
"갑자기 일이 있어 조기 퇴근해야 겠어요. 문 앞에 안내문 붙여 주
고 지금 대기실에 있는 환자들만 보기로 하죠."
승빈이 세희의 병실을 노크하고 들어갔을 때는 휑하니 비어 있는
병실에 세희 혼자 잠들어 있었다.
얼굴엔 심한 멍이 들어 있고 입술이 터져서 부어 있었다. 푸른 잉
크로 병원 이름이 써져 있는 시트자락이 목까지 끌어 올려 덮여져 있
었다. 시트자락에 가려진 몸이 또 얼마나 많이 다쳤을까? 하는 걱정
이 되었지만. 차마 어떤지 들춰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불쌍한 여
자.....] 승빈이 가평에서 밝았던 세희의 얼굴을 떠올리며 안쓰러운 마
음으로 내려다 보았다.
하얗고 가는 손을 잡으려다 잠을 깨울까봐 거두어 들여 조용히 병
실을 나갔다.
접수대로 간 승빈이 보호자로 나서자 간호사들이 환자의 남편인가
싶은 눈초리로 처다 보는데 그 안에 경멸의 빛이 들어 있었다. 그
눈빛은 담당의 에게서도 볼 수가 있었다. 세희의 남편이 내일이라도
찾아 왔을 경우 혼선이 없도록 하기 위해 승빈은 환자의 친구라고 자
신을 밝혔다. 환자가 119 구급차에 실려 왔으며 지금 상태가 어떠한
지를 상투적인 말로 승빈에게 전해주는 담당의였다.
승빈이 다시 병실로 돌아 왔을 때 세희가 깨어 있었다.
"오셨군요. 죄송해요. 병원에서 보호자를 찾는데 마땅히 연락 할
곳이 없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기로 했잖습니까. 괜....
찮으세요?"
고개를 돌린 세희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흐르고 있다. 이제는 크
리넥스 두장으로는 막을 수 없는 눈물이였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울어요. 소리 죽이지 말고 소리내어 울어요."
"........."
"피하지 그랬어요? 도망가지 그랬어요? 답답한 사람 같으니."
"........."
승빈은 화가 났다.
"남편께서는 지금 상황을 알고 계신가요?"
"네."
"그런데 안 오시는 건가요?"
"...."
"정말 몹쓸 사람이군요. 사람을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 수습도 안
하려 하다니... "
"...."
"밤에라도 들릴지 모르니 제가 있기에도 그렇군요. 보호자 없이 괜
찮으시겠습니까? 친정 어머님께라도 연락을 하시죠? 의사 말로는 한
동안 입원치료를 해야 할 것 같다던데.. 제가 보기에도 그렇고요."
"내일쯤 퇴원이 되는지 알았어요. 아닌가요?"
"네. 내일은 어렵겠어요."
"그렇다면 정말 선생님만 번거롭게 해드렸군요. 친정에 연락을 할
걸..."
"아니요 제겐 전화 잘 하셨습니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시고 지금
전화를 하세요. 누구든 보호자가 오실 때까지 제가 문 밖에 있겠습니
다."
승빈은 문 밖에서 착잡한 장승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