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스물 하나].... 귀가
"세희씨. 괜찮으세요?"
"후후.. 네 조금 취하긴 했는데요. 술이 마시다 보면 는다는 말이
사실이더군요. 늘 집에서 연습한 탓인지 아직은 괜찮아요."
"집에서 술 많이 하시나요?"
"많이요? 글쎄요."
"처음엔 맥주 한 모금을 목으로 넘기기가 힘들었었어요. 그 느낌 모랄
까? 목구멍을 통과할 때 매우 썼죠. 그러다 두 모금 째에는 조금 낳아지
더군요. 그러다 한잔.. 한병.. 두병.. 그리곤 어느 날 다른 술들도 있다
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래서 제법 술이 쎄답니다."
"세희씨 술로 기분을 다스리는 것은 안 좋습니다."
"술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잠시나마 제 정신을 쉬게 할 수 있는 방법
이...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운동을 해보시지 그러세요?"
세희의 고개가 가볍게 좌우로 도리 질 치고 있었다.
"요즘 주부들 문화쎈터에서 취미생활로 이것저것 많이 배우나 보던
데, 그런 것은 어떨까요? 찾아보시면 그래도 한 두개 맞는 게 있을텐
데요.
세희는 여전히 도리질 치고 있었다. 술잔을 향한 듯한 시선에서 멈
추어 있는 고개가 조금 더 숙여지고 있었다. 세희의 작은 어깨가 더
욱 작아 지고 있는 듯 했다.
"세희씨! 내가 친구가 되드린다고 했지요?"
"네."
"그럼 이건 의사가 아닌 친구로서 하는 말인데요. 혼자 술마시는거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정 술을 하고 싶을 때는 내게 연락하세요. 술
친구 해드릴께요."
"노력해 볼께요. 그런데, 선생님."
"네. 말씀하세요."
"왜 제게 이렇게 친절하세요?"
"한것도 없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오히려 무안한데요?"
"선생님께는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늘 공존해요."
승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이만 일어날까요? 많이 늦었는데..."
승빈은 늦어지는 세희의 귀가에 마음이 쓰여 일어나기로 했다. 제
법 많이 마신 술에 정말 세희는 부축 없이 혼자 걸어갔다. 처음 함께
한 술자리에서도 술에 약하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새 더 늘은
것 같았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가평 부모님께도 감사하다는 인사 다시한번
꼭 전해주세요."
"집까지 모셔다 드려..."
"아니에요. 친정 집으로 갈꺼예요. 애들도 그곳에 있고.."
"아~ 네. 그럼 그곳으로 모셔다 드리죠."
"아니에요. 그냥 택시 타는 게 좋겠어요."
"아닙니다. 늦은 시간이고, 술도 하셨고,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
다."
"선생님도 술 하셔서 댁에 가시려면..."
트렁크에 실린 짐들 때문에 대리운전을 시키고 승빈과 세희는 나란
히 뒷 자석에 앉았다. 세희가 말한 행선지까지 가는 동안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가끔 서로 반대 방향의 창문 밖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기사가 갸우뚱하며 백 미러 몇번 확인하곤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세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승빈
이 아무 말 없이 포개져 있는 세희의 손을 잡아주었다. 「걱정 하지
말아요. 괜찮을 겁니다.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세희를 내려놓은 승빈의 차가 멀리 사라져 안 보일 때 세희는 또
다른 택시를 잡아탔다.
예상했던 데로 올려다 본 거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세희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시 37분. 길게 한숨을 한번 더 몰아내고 죽은
시체처럼 그렇게 집을 향했다.
경비실에 가평에서 받아온 짐을 맡겨 놓았다. 엘리베이터의 숫자들
이 높은 숫자를 향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한번의 정지도 없이 11
층까지 올라와 버린 엘리베이터에서 몸을 빼내기 전에 다시 한번 심
호흡을 했다. 벨을 눌러야 하나, 열쇠를 이용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
남편이 안자고 있는 것을 알지만 열쇠를 택했다. 손잡이를 잡은 세희
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다녀왔어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남편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는 일도 없었다. 세희가 씻고 나왔을 때까지도 여전
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세희는 늦은 것에 대한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기로 했다.
"즐거웠나?"
"....."
"모처럼 남자들과 어울리니 시간 가는 줄 몰랐나?"
"늦어서 미안해요."
"그래 어디서 모 하시느라 이렇게 늦으셨나?"
여전히 읽지도 않는 책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남편의 말이 이어지
고 있었다.
"술냄새로 보아 어울려 춤도 추셨겠군. 그래 몇 명과 돌아가며 추
었지? 뒤풀이 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인데... 그래 다녀왔나? 즐거웠어?"
빈정대는 말투를 참을 수가 없어 잠을 자려 애들 방으로 향하는데
남편이 책을 내려놓았다.
"내말 아직 안 끊났어. 적어도 어디서 모 하다 늦었는지 말을 해야
하잖아!"
"동창회 간다고 허락 받고 나갔잖아요."
"허락? 새벽 두시가 다 되가는 시간에 들어온다고 내게 말했던가?
내가 놀면서 12시를 넘겨 들어온 경우가 있던가?"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미안하다? 미안? 내가 전에 경고했던 말을 잊은 것 같군."
방문 앞에 장승처럼 서있는 세희의 팔을 움켜잡아 돌려세우며 소름
끼치는 낮은 목소리로 남편이 세희의 귀에 대고 말했다.
"천박하게 굴지 말라고 말했었지?"
남편이 세희를 잡은 팔에 힘을 주어 안방으로 끌어가고 있었다. 세
희는 문턱에 주저앉아 들어가지 않으려 버티었다. 예전엔 애들이 있
어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방으로.. 지옥의 방으로.. 고문실로.. 끌려들
어 가곤 했었다. 전에 없던 세희의 행동으로 남편의 눈에서 광기 어린
빛이 나고 있었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내가 왜 맞아야 하죠? 내가 사람으로 안 보
이나요? 내가 그저 당신의 애완용 짐승인가요? 나와 결혼은 왜 한 거
죠? 애들은 왜 낳았어요? 내가 당신에게 무슨 죽을죄를 지었나요?
왜 내게 이러는 거죠? 제발 이러지 말아요. 나도 사람이에요. 사람같
이 살고 싶어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제발."
세희는 술기운 때문인지 소리소리 지르며 가슴속 말을 뱉어 내었
다.
"밖에 한번 나가 제법 많이 배워 왔군."
세희의 흥분과 눈물 섞인 고함소리에도 남편은 여전히 낮고 차가운
말투였다. 기어이 방으로 끌고 들어간 남편이 예지 없이 청테이프로
세희의 입을 봉했다.
"갑자기 어디서 그렇게 용감해 졌지? 오늘 같이 놀아난 놈이 한수
지도해 주던가? 그래?"
남편의 주먹이 세희의 얼굴에 날아들었다. 정신이 아득해 질정도로
세희는 나가 떨어졌다. 세희의 옆구리에 끊어질 듯한 통증이 이어지
고 여기저기 발길질이 이어지고 있었다. 세희는 살아야 한다고 생각
했다.
그렇게 맞으며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두 팔로 감싸 안으
며 연신 두손바닥을 정신없이 비비며 봉해진 입 대신 살려달라고 빌
고 있었다. 남편은 잔인하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주먹과 발로
세희를 무너트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정도
남편의 분이 풀린 걸까?
세희가 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아득하고 혼미하게.. 몸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축 늘어진 세희의 몸이 저 멀리 바닥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 아... 선생님 살려주세요....나 이렇게 죽는 건가봐요.......
승빈씨...... 나 이렇게........]
세희는 의식을 놓는 순간까지 승빈을 불렀다. 테이프로 봉해진 입
안에서........